인물사박물관

범일동 풍경을 그린 천재 화가 이중섭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1동 1422-82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으며, 1937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온 이듬해 원산사범학교에서 미술교사가 된다.
한국전쟁발발 후 1·4후퇴때 이중섭은 아내와 두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온다. 우암동 피란민 수용소에서 살며 부두 노동을 하던 그는 1951년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건너갔다. 그해 12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범일동 귀환 동포마을 변전소근처에 판잣집을 짓고 생활했다.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이중섭과 마사코는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52년 마사코는 영양실조에 걸린 아들을 데리고 친정이있는 일본으로 돌아간다. 이중섭은 가족을 떠나보낸 후 홀로 부산에 남아 낮에는 부두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술로 외로움을 달랬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정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는 광복동 일원의 밀다원, 금강다방, 그리고 부둣가의 술집들을 전전하며 부산으로 피란온 예술가들과 친밀한 교분을 나눴다. 비록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며 끼니를 해결하는 가난한 화가 신세였지만 이 곳에서〈범일동풍경〉이라는 명작을 탄생시킨다.
범일동 553번길주변에 조성된 이중섭거리에는 그의 고단했던 삶과 치열했던 예술 세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희망 100계단 끝 이중섭전망대에 이르면 당시 이중섭이 아내 마사코에게 보낸 절절한 편지를 읽을 수 있다.

기다리는 마음으로, 천재 시인 김민부
부산광역시 동구 영초윗길26번길 11
168계단의 중간에서 우측으로 빠지면 부산항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김민부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의 한쪽벽면에는 고교 음악교과서에도 수록될 만큼 널리 알려진 가곡이자 김민부가 가사를 쓴〈기다리는마음〉이새겨져 있다.
겨져 있다.
부산이 낳은 천재시인 김민부는 동구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병석으로 그는 범일동 성남초등학교 재학 시절두 차례나 월반을했고, 중학교 입학시험에선 부산 최고점수를 받을정도로 뛰어난 학생이었다. 부산중학교 재학시절 김민부로 개명한다.
김민부는 부산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중일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석류〉로 입선하고 그해 4월에는 부산대와 부산일보가 공동주최한 제1회 전국학생문예작품 콩쿠르에서〈딸기밭에서〉라는 시로 특선을 차지한다. 고등학교 2학년때는 첫번째시집〈항아리〉를 발표했고, 고3때는시조 〈균열〉이『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등 특출난 문학적 재능을 자랑했다.
그는 1960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국문과에 편입해 졸업한 후 1962년 부산문화방송국에 입사해 라디오 프로그램‘자갈치아지매’를 기획, 집필한다. ‘자갈치아지매’는 아직도 방송되고 있는 해당 방송사의 최장수 프로그램이다. 결혼 다음해인1965년에는 서울로무대를 옮겨 MBC,DBC,TBC 등에서 방송작가로 두각을 나타낸다.
1970년엔 오페라〈원효대사〉의 극본을 써서 김자경오페라단이 이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행복을 노래한 시인 유치환
부산광역시 동구 망양로580번길 2 유치환의 우체통
초량 이바구길의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이면 유치환우체통이 보인다. 동구망양로 580번길에 조성된 이 공간은 산복도로를 한 눈에조망하는 전망대일뿐만 아니라 편지를 넣으면1년뒤수취인에게전달되는 느린 우체통이있는 곳이다.
청마 유치환은 1908년 통영 태평동에서 부친 유준수와 모친 박우수 사이 5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유치환의 형은저명한극작가인동랑유치진이다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유치환은1931년「문예월간」에〈정적(靜寂)〉이라는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다. 1932년평양으로 이주해 사진관을 경영하지만 형편이 펴지지않자 1934년부산 동구의 초량동 100번지로 이사를 온다.이때그는 화신연쇄점에서 근무하며 시인 조벽암 문하에서 구매 사무를 보고, 아내 권재순은 현재의 초량동 삼일유치원에서 보모로 일한다. 1935년에는 초량동집에서 득남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해방이후 유치환은 활발하게 시작활동을 이어간다.한국전쟁때 부산으로 피란 온 그는 문인구국대를 조직, 육군 제3사단으로 종군하기도 한다. 1952년 10월에는 초량4동에 위치한 부산고등학교의교사로부임하여교가를작사하기도했다.
1963년에는 경남여자고등학교에 교장으로 취임한다.이후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현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의 교장직에 있던 그는 1967년 2월 13일 부산문인협회의회원들과 모임을 가진후 수정동 자택으로 귀가하던 중 좌천동 봉생병원 앞 건널목에서 시내버스에 치이는 사고를 당한다. 곧바로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도중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동구 수정동의 이바구길에는‘시인의길’이있다.그가 교편을 잡았던 경남여고에서부터 수정가로공원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봉생병원앞에서 사고로 눈을 감은 청마 유치환이 생의 마지막 걸음이 묻어 있는 길이다.
그를 기리고자 수정가로공원에는 유치환의 시〈바위〉가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초량 이바구길 유치환 우체통옆에는〈행복〉이 새겨진 황금빛 시비가 빛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