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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산의 선각자이자 상공인 박기종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7.10.30 조회수 2023

부산의 선각자이자 상공인 박기종

부산의 선각자이자 상공인 박기종
  • 박기종(1839-1907, 朴琪淙)
  • 1839.11월 동구 좌천동 출생
  • 부산최초 신식학교, 개성학교 설립
  • 우리나라 최초 민간철도 회사 창설
  • 행경찰관박공기종영세불망비, 행첨사
    박공기종영세송덕비 등 - 정공단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에서 제물포까지의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1905년 1월 1일 서대문에서 초량까지의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부산 철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876년 5월 김기수는 수신사 정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다음해 곡산군수로 있을 때 수신사 여행기 [일동기유]를 썼다. 이 책에서 기차를 화륜거(火輪車)라 소개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이 쓴 최초의 철도 기록이다. 1880년 6월 김홍집은 수신사 정사로 파견되었다. 그도 국가 운영상 철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1876년 부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항장이 되면서, 근대 문물이 들어오는 창구가 되었다. 부산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개항 후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근대의 물결을 타고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나갔다. 개항 후 부산 근대사의 첫 장을 연 대표적인 사람은 아마 박기종(朴琪淙, 1839-1907)일 것이다. 그는 김기수, 김홍집 수신사 때 통역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가 꿈구었던 가장 중요한 ‘근대의 꿈’도 바로 철도였다.


집안과 경력

그는 1839년(헌종 5) 11월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형진, 본관은 밀성(밀양)이다. 증조부는 박운흥, 조부는 박춘언, 부는 박영순, 증조모는 이씨, 조모는 문씨, 모는 오씨, 처는 윤씨이다. 직계 선조의 경력은 잘 알 수 없으나, 교지에는 박운흥 [박춘언 ]박영순 모두 학생(學生)으로 기록되어 있다.
1906년(광무 10) 11월 박기종·김낙준 등이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柔遠閣先生埋案感古碑)]를 세웠다. 대일 외교업무에 종사했던 선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왜관(倭館)이 존재했던 시기에 종사했던 대일 외교업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비문에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비문에 적힌‘유원각선생’은 통사청에 근무했던 소통사(小通事)라고 생각한다. 소통사는 일본어 역관인 훈도·별차를 보조하면서, 왜관의 각종 실무에 종사한 동래부의 하급 통역관이었다. 그는 계장(?長)으로서 비를 세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개항 전 경력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넷째 사위 윤상은의 회고담에 따라, 동래상고도중(東萊商賈都中)에 드나들면서 일본어와 상업을 배워, 조선상인과 일본상인 사이에서 거간 일을 맡아본 것으로 추정하는 게 고작이었다.

경찰관 박기종 영세불망비 (1893.09)경찰관 박기종 영세불망비 (1893.09)

[동래부계록]에 보면, 개항전인 1869~1871년 당시 동래부 소통사로 활동하였다. 특히 1869년에는 거제도 옥포(玉浦)를 담당하는 옥포통사였다. 이것은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빠른 경력이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가 맺어진 후, 그해 5월 김기수 수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는 통사 4명에 포함되었다. 1880년 6월 김홍집 수신사 때도 통사로 따라 갔다. 개항 후 최초의 대외사절단 통역을 맡은 것은 일본어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어 실력은 소통사 집안이라는 출신 배경의 산물이었다.
관계 진출은 1880년 이후 두드러졌다. 교지에 보이는 주요 경력은 용양위부호군(1880년), 용양위호군 경위궁위장(1883년), 부산항경찰관(1886년), 다대포진수군첨절제사겸 동래감목관(1893년), 부산항사검관(1893년), 친군총어영기사장(1893년), 절영도진수군첨절제사(1894년), 부산항경무관(1894년), 외부참서관(1898년), 중추원의관(1900년), 판리공사(1905년) 등이다. 1893년 4월~1894년 2월 다대포진첨사, 1894년 8월~1895년 8월 절영도진첨사를 맡았다. 절영도진 폐진(廢鎭)으로 마지막 절영도진첨사가 되었다. 특히 1886년에서 1898년까지 10여년 동안 부산항 경찰관, 사검관, 경무관 등으로 근무하면서, 개항장의 치안과 무역 등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그는 기술교육에 대한 집념이 강하여 장남 정규를 일본 사도[佐渡]광산학교에 유학시켰다. 졸업하자 곧 광무국(鑛務局) 주사로 취직시켜 광산개발에 노력하게 했다. 차남 창규를 일본 철도학교에 유학시켰다. 정규는 공무아문주사, 농상공부기사, 동래감리서주사, 삼화감리서주사를 역임한 후 함양군수, 경상남도관찰도참서관, 사무관, 밀양군수, 공립밀양보통학교장, 진주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창규는 경상남도관찰부주사, 수륜원주사 등을 역임하였다. 넷째 사위 윤상은은 그가 세운 개성학교를 졸업하였다. 구포저축주식회사(구포은행) 설립 등 부산 근대 경제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부산 최초의 신식학교 개성학교 설립

박기종은 1876년 김기수 수신사행 때 처음 일본을 보았다. 수신사행의 방문은 20일 정도에 불과했지만, 조선소, 제철소, 포병창, 학교 등 신문명(新文明)의 시설을 시찰하였다. 1876년, 1880년 두 차례의 일본 방문에서 본 신문명은 근대의 꿈을 키우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꿈은 1895년 5월 부산 최초의 신식학교인 개성학교(開成學校) 설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름은 [주역]에 나오는 [개물성무(開物成務)]에서 따온 것이다.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도리를 깨달아, 이것을 실제 시행하여 성공한다]는 뜻이다. 수신사행 때 참관했던 개성학교(동경대학의 전신)와 같은 학교가 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학교는 박기종·이내옥·배문화·변한경(셋째 사위)·이명서 5명이 공동 출자하였다. 전직 일본육군 예비상무학교 교사였던 아라나미 헤이치로(荒浪平治郞)가 초대 교장으로 교수·교무 업무를 맡았다. 1896년 3월 1일 약 100명의 학생으로 영주동 교사에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1891년 5월 관립 경성일어학당, 1895년 1월 관립 인항(仁港)외국어학교에 이은 3번째 일어학교였다. 1898년에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였다.
1897년 1월 공립학교로 인가를 받으면서, 매년 학부(學部)로부터 1,200원,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1,800원의 보조금을 받았다. 외무성 보조금은 그후 3,000원으로 늘어났다. 보조금은 중요한 재정기반이 되었다. 보조금 중 1,000원은 마산·동래·밀양·대구·경주의 일어학교 보조금으로 분배되었다. 유품인 [개성학교금수취록]은 학교 재정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부산 주변의 일본어 학습열이 높아지면서, 개성학교의 도움을 받는 지교(支校)·보조교가 늘어났다. 1905년에는 3개 지교, 4개 보조교를 가진 부산·경상도 일대의 중심적 일어학교가 되었다. 개성학교 약칙(1903년) 제1조에는 “본교는 한국국민의 지능을 계발하고 도덕을 함양하고 인재를 양성함을 주로 한다.”고 하여, 민족의 자주적 개화문명을 일으키고자 함을 근본 취지로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일어로써 개명한 학술을 연마하여 양국 간의 국교 화친에 이바지하는 것이 교장 등 일본인 교사의 본뜻이었을 것이다. 개성학교는 자주적 문명개화와 식민지교육의 포석이라는 한일 양국의 다른 꿈을 꾸는 곳이 되었다.
한말에 정부가 교육법을 정비하고 체제가 갖추어진 학교를 설립하면서, 사립학교를 관·공립학교로 이관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1907년 관립 이관의 통첩을 받았지만, 이를 반대하고 사립보조학교로 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3월에 사립부산개성일어학교로 이름을 고쳤다. 그러나 1908년 3월 정부로부터 보조금 단절 통첩이 와서 경영이 어려워지자, 학교를 학부에 헌납하였다. 4월에 학부는 교직원과 학생의 대부분을 인수하고 학교 자리에 공립부산실업학교와 공립부산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개성학교는 110년이 지난 지금도 개성고등학교(부산상고), 개성중학교, 봉래초등학교로 맥이 이어지고 있다. 부산상고는 인문계고로 전환하면서 2004년 11월 1일 교명을 개성고등학교로 확정하였다.


기선회사와 최초의 민간철도회사 설립

그는 1886년 10월 부산항 경찰관에 임명되었다. 재직 기간에 기선회사 설립에 착수하였다. 회사는 1889년 4월 통리아문으로부터 정식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일본에서 기선을 구입하여 낙동강 연안의 포구를 왕래하면서 상업할 계획을 세우고, 사업이 번창한 후에 통리아문에 세금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인가받았다. 그가 설립을 주도하고, 부산항 감리서 관원 정현철·민건호, 일본인 마쓰오[松尾元之助] 등도 참가하였다.
회사는 1890년부터 운항을 개시하였다. 설립 초에는 소형 기선 1척에 판선(板船) 여러 척을 끌고 구포·삼랑진 등을 왕래하면서, 이익금의 1/10을 받는 영업을 하였다. 1890년 11월에는 유노마루[雄乃丸]를 구입하여 보다 멀리까지 영업하였다. 1891년 11월 30일 배가 낙동강 하구에서 침몰하여 선원이 모두 사망하였다. 이로써 회사 경영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 상인의 내륙행상을 지원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1891년 11월 오가와[小川實]는 사원 자격으로 미개항장인 평양으로 들어갔다. 회사는 1893년경 일본 오사카(大阪)상선주식회사 및 아사히구미[朝日組] 조선기선주식회사와 협동계약을 맺었다. 이때부터 영업권이 사실상 오사카상선과 아사히구미에 귀속되면서, 박기종은 기선회사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그는 1898년에 외부참서관이 되었다. 이때부터 필생의 소원인 철도건설에 주력하였다. 낙동강 하구의 하단포는 구포와 함께 수운을 이용한 화물 집합지였다. 하단포 부근은 매년 많은 배가 침몰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박기종·윤기영 등은 부산항과 하단포를 연결하는 약 6㎞의 경편(輕便)철도 부설을 1897년 농상공부에 신청하였다. 서류 결함으로 거절되었다가, 1898년 5월에 재신청하여 6월 3일 부하(釜下)철도회사 설립을 인가받았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철도회사 창설로 보고 있다. 임원은 도(都)사장 이재순, 사장 안경수, 부사장 민영철, 경무원(經務員) 박기종 등이었다. 여러 번 측량을 하고 공사를 시작했지만, 자금부족, 노선의 부적합, 경부선 부설계획의 결정 등 이유로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특히 노선 중간에 위치한 해발 130m의 대티고개는 공사의 큰 난관이었다.

칙명(1898.08.17) 외부참서관 주임관 5등 임명칙명(1898.08.17) 외부참서관 주임관 5등 임명

1899년 3월경에 박기종·홍긍섭·이규환 등이 발기한 대한국내철도용달회사는 6월에 경성-원산-경흥을 연결하는 경원선, 함경선 부설을 신청하여 허가 받았다. 임원은 사장 이하영, 부사장 지석영, 평의장 이인영, 평의원 박기종 등이었다. 7월에는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경의철도부설권 기한이 만료되면서, 대한철도회사 이름으로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대한철도회사는 대한국내철도용달회사와 다른 회사가 아니고, 같은 회사가 2개 부설권을 얻기 곤란하므로 명칭만 달리 한 것 같다.
철도부설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자금조달이었다. 그는 자본이 부족하다고 외국인과 협의하다가는 부설권을 탈취당하므로, 국내 관민이 협의하여 자본을 마련할 것을 강조하였다. 구체적 방법으로 중앙·지방관료들이 봉급의 일정액을 출자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민간자본의 동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1899년 11월경에는 대한국내철도용달회사는 존재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는 경원·경의철도 부설뿐 아니라 국내 철도지선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지선 부설까지 외국에 빼앗길 염려가 있으므로, 원산에서 고성(高城) 금강산 입구, 공주에서 군산항, 전주에서 목포항, 대구에서 진주, 대구에서 강원도 간성의 5곳을 예정하고, 경인·경의·경부선과 연결하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경의철도부설 계획은 오랫동안 착수되지 못하다가 1903년 부설권을 확인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부설권 탈취 책동에 따라 이재완·박기종 등이 부설권 매도교섭을 벌이다가, 1903년 9월 부설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한편 1902년 6월 김석규·박기종·이용복·유기남·유지연이 발기인이 되어, 삼랑진과 마산을 연결하는 삼마철도 부설을 계획하고, 사업을 영친왕궁에 부속시켜 영남지선철도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는 부설권 획득에 필요한 경비와 부하철도 계획 실패로 인한 손해를 회복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일본공사와 교섭하였다. 일본도 이근택·김영진을 움직여 그가 가지고 있던 부설권을 일본의 경부철도회사에 양도하는 공작을 전개하였다. 결국 회사 설립 몇 개월 후에 부설권은 일본에 매도되고 말았다.
경원선 건설은 국가의 재정원조를 받지 않은 채 겨우 측량을 하는 단계에 머물렀다. 이 단계에서 그는 이미 일본의 차관도입을 검토하였다. 영남철도지선회사는 일본의 완전한 금융지배를 받는 회사로서, 일본의 부설권 획득을 중개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철도 건설을 위한 그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의 철도건설 계획은 근대문명의 도입단계에서 어느 나라나 경험하였던 시행착오의 한 단면이었다. 그의 꿈은 외래 자본주의 압박, 자신의 봉건성, 외래 자본주의와의 타협 등 여러 이유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관련 자료와 유적

상경일기(1898.03~1899.02)상경일기(1898.03~1899.02)

그는 [상경일기]와 [도총(都總)]이라는 책을 남겼다. 두 책은 외부참서관에 임명되기 직전부터 시작하여, 재임중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한말 외교관계의 중요 사항을 매일 일기체로 쓴 한말 외교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상경일기]는 1898년 3월 1일(양력 3월 22일)부터 1899년 2월 14일(양력 3월 25일)까지의 순한문 일기이다. 당시의 대신, 외국공사·영사 및 각계 인사와의 접촉, 외교관계의 주요사건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외부참서관으로 근무하면서 능숙한 일본어와 친교 등을 바탕으로 당시의 중요 현안에 대해 중재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2005년 2월 [부산근대역사관 사료총서⑴]로 국역 간행되었다.
[도총] 1권은 1898년 6월 13일부터 1899년 3월 7일, 2권은 1899년 3월 9일부터 1900년 9월 29일까지 사실을 국한문혼용체로 기록하고 있다. 외교상의 현안문제를 처리하면서 처리 결과, 자신의 의견, 정부의 지시 등을 모아 놓은 중요한 자료이다. 그 중에서도 회사를 설립하여 철도자력부설운동에 주력한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두 책, 각종 교지, [개성학교금수취록] 등 문헌자료와 그가 평소 사용하였던 유품은 증손 박상수(朴祥洙)에 의해 기증되어, 현재 부산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1995년 부산상고가 개교 100주년 기념탑을 세우면서, 그의 공을 기려 기념탑 앞에 설립자 박기종 흉상을 세웠다. 현재 부산상공인의 핵심 단체인 부산상공회의소의 효시는 1889년 설립된 부산객주상법회사이다. 1989년 간행된 [부산상공회의소백년사]에 수록된 역대 회장 사진의 첫머리에 그의 사진이 실려 있다. 1895년 부산항경무관으로 재임하면서, 객주 등 토착상인의 조직을 시도하고, 그들로부터 영업세를 거둘 목적으로 부산상무소(商務所)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도총(1898.06~1900.09)도총(1898.06~1900.09)

부산항경찰관, 다대포진첨사, 절영도진첨사의 경력과 관련된 유물로는 1893년 9월 순사청이 세운 [행경찰관박공기종영세불망비(行警察官朴公琪淙永世不忘碑)]와, 1895년 3월 교리군민(校吏軍民) 등이 세운 [행첨사박공기종영세송덕비(行僉使朴公琪淙永世頌德碑)]가 정공단(동구 좌천동) 안에 남아 있다. 2001년 10월 17일 부산경찰청 내에 개관된 부산경찰역사전시관에는 ‘부산경찰 역사인물’로서 박기종 전시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1906년 그가 중심이 되어 세운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는 원래 부산시 동구 초량6동의 산기슭에 있었으나, 지금은 부산박물관 뜰에 옮겨져 있다. 이 비는 한일관계사와 관련된 비문의 중요성 때문에, 부산시 유형문화재 48호로 지정되었다.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1906. 09)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1906. 09)

[동래통안(東萊統案)] 계사년(1893) 5월 18일자에서는 “박기종은 이 지역 토착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일본인과 함께 처신하기를 익혀 바깥 사정에 밝아서, 부산항내의 모든 사무가 매번 이 사람의 경륜에 의존하니 이것은 경향간에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부산에서의 그의 존재와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평가라고 하겠다.
그는 1907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수정동 선산에 묻였다가, 부산진매축공사 때 산이 헐려 기장군 일광으로 이장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 가지만, 부산 곳곳에 자취가 남아 있다. 그의 ‘근대의 꿈’을 실었던 기차는 한번도 달려보지 못했다. 경부선 개통 100년을 맞으면서 한국·부산 철도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에 관한 내용은 [고종실록], [부산항관초], [동래통안], [통서일기], [일본외교문서],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등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그의 활동이나 사상 등 박기종 연구의 가장 중요한 사료는 그가 남긴 [상경일기]와 [도총]이다. [도총]도 하루 빨리 국역되기를 기대하면서, 최근 국역된 [상경일기]의 일독을 권한다. 보다 많은 관심과 연구를 통해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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