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인물
제목 | 독도지킴이 안용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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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8.08.07 | 조회수 | 2664 |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일본 막부정부가 자인하도록 활약한 민간 외교가이자 어부이다. 안용복의 인적사항은 그 이름을 빼면 정확한 것이 드물다. 사망한 해는 전혀 알 수 없지만, 태어난 해는 1658년과 1652년의 두 학설이 제시되고 있다. 그는 동래부 좌천리(오늘의 좌천동)의 평민 가문에서 출생하였는데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어부이면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좌수영 수군의 능로군(노젓는 수군)으로 복무했으며, 왜관(倭館)에 자주 드나들며 일본말을 익혔다고 한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일본어민이 울릉도에 침입하자 이를 막다가 부하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일본의 에도 막부에게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주장하여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書啓)를 받았으나, 귀국 도중 나가사키에서 쓰시마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기고 50일간 대마도에 억류되었다. 이후 안용복은 동래부 왜관에 넘겨졌고 여기서 또 40여일 억류돼 있어야 했고 동래 감옥에서 90일간 구류되어 무혐의로 석방될 때까지 무려 180일간 연금생활을 하였다. 왜관에서 풀려나자 안용복은 동래부사를 찾아가 전말을 이야기하자 부사는 "함부로 남의 나라 국경을 침범했다."하여 월경죄로 2년간의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그 기간 동안 안용복의 국토수호 의지를 더욱 굳게 하였다. 숙종 21년(1695년) 여름 안용복은 떠돌이 5명, 뱃사공 5명을 모아 다시 울릉도로 향했다. 마침 일본인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울릉도에 들어와 있었다. 싸움 끝에 일본인들이 도망치자 끝까지 추격하여 그간의 상황을 자세하게 번주에게 설명하고 또 다시 "울릉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쥐고 그 해 가을 강원도 양양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양양현감이 이들 일행을 구금하자 안용복은 부사 1명과 양양 감옥에서 탈출, 동래부로 달려갔다. 1차 도일사건의 전말을 잘 아는 동래부사가 그의 애국충정을 이해하여 줄 것을 믿고 불철주야 동래로 달려갔으나 오히려 다시 체포되어 한양으로 이송되고 비변사에서 국문 받은 안용복 등은 참형에 처하라 하였다. 이때 원로대신 남구만(영의정을 지냄), 윤지완 등이 안용복 처형을 숙종에게 만류하자 숙종은 안용복을 참형 대신 귀양을 보냈다. 그 사건의 결과로 1697년(숙종 23년) 일본막부의 명을 받아 대마도주 종의진이 조선 동래부 습봉 경축 사절에게 일본의 울릉도 도해금지 결정을 구두로 알려왔고, 이어 조선 조정은 안용복을 석방하였다. 1697년 3월 조선조정은 대마도에 대해 울릉도 영유권을 확인하는 문서 초안을 제시하고 이듬해(1698, 숙종 24년) 4월 조선 일본 양측이 조선의 울릉도 영유권 확인 문서를 확정, 1698년 7월 15일 막부노중아배마사다케가 상기 문서를 양해하고 1699년(숙종 25년) 1월에 대마도가 조선 측에 막부가 이 문서를 양해한 것으로 알려와 마침내 울릉도 독도를 둘러싼 조선 일본 간 영유권 분생은 종결되었다. 미천한 수군의 노군이자 일개 어민에 지나지 않았지만 뒷날 사람들은 안용복을 장군으로 칭호를 붙이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때로는 수포장(搜捕將)이라고도 하고 울릉군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모두 민중이 붙인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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