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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좌천동 동명제재소 강석진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7.10.30 조회수 4685

좌천동 동명제재소 강석진

좌천동 동명제재소 강석진
  • 강석진(1907-1984, 姜錫鎭)
  • 동구 좌천동 동명제재소 설립
  • 목재왕, 수출왕, 납세왕
  • 부산을 지키는 토박이 기업인
  • 대한민국 팔각회 창립, 총재역임
  •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 설립

성장과정과 동명제재소

대대로 부산에서 살아 온 토박이 부산 사람이 아니면서도 그 누구보다 부산을 아끼고 사랑하고 키워온 철저한 부산 사람은 강석진(姜錫鎭, 1907~1984)이었다. 강석진은 1907년 12월 21일에 경북 청도군(淸道郡) 풍각면(豊角面) 덕양동(德陽洞)에서 아버지 강병우(姜炳祐)와 어머니 서순득(徐順得)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만년에 자기의 인생을 걸고 키워온 동명목재(東明木材)의‘동명’을 따서 스스로 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그의 집은 할아버지 때까지만 해도 한 해의 추수를 몇 백 섬이나 하던 넉넉한 생활을 누려 왔으나, 생각지도 못한 송사(訟事)에 말려들면서 하루 아침에 많은 재산을 다 날리고 가난뱅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그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외가에 가서 머물기도 하고, 혹은 시집 간 누나의 집에서 얼마동안 얹혀 지내는 등 실로 딱한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토록 어려운 처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고작 아버지로부터 틈틈이 약간의 한문을 배운 것과 청도 보통학교(淸道普通學校)를 나온 것이 그가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
보통학교(현 초등학교)를 졸업한 소년 강석진은 나름대로 고민한 나머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가서 활동 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리하여 불과 열 다섯의 어린 나이에 완전히 맨 주먹으로 정든 고향 청도를 떠나 무작정 남쪽의 큰 도시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부산에 온 강석진은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중 실로 우연히 발이 닿은 곳이 가구점거리로 이름난 지금의 동구 좌천동에 있던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어느 가구점이었다. 이 가구점은 원목을 켜서 여러 종류의 가구를 만들어 판매하는 곳으로, 그는 여기서 심부름꾼 겸 견습공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는 여기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성실과 근면, 그리고 나무를 잘 다듬는 솜씨로 주인의 신임을 얻는 한편 목공(木工)의 기능과 기술을 착실히 익혀 가며 비록 적은 돈이긴 해도 매달 받는 월급을 꼬박꼬박 알뜰히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몇 년을 지내는 사이에 그의 기능과 기술은 날로 발전하여 선배 기술자들을 능가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주인으로부터 많은 칭찬과 파격적인 대우를 받아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강석진은 돈을 벌어 잘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독립하여 내 손으로 사업을 경영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라 생각하고, 몇 년간 일해오던 가구점에서 나와 역시 좌천동에서 불과 10여 평의 조그마한 가구점을 겸한 제재소를 열고 이름을 동명제재소(東明製材所)라 하니, 이것이 뒷날 유명한 동명목재상사(東明木材商社)의 모태(母胎)가 된 것이다. 때는 1925년 4월이요,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8세의 소년이었다.
이제 어엿한 한 사람의 사업주가 된 강석진은 자신이 고용주(雇用主)이면서도 직접 종업원들과 함께 작업장에서 원목을 켜 판자와 각목을 만드는 것은 물론 손수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대패로 다듬어서 질 좋은 목재와 탐스러운 가구를 만들어 내었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내고 나니 어느 사이에 동명제재소에서 생산된 목재와 가구는 그 품질의 우수성이 이미 널리 알려져 부산·경남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대구·경북 지방에서도 목재와 가구의 주문이 언제나 밀려들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사업은 해를 거듭 할수록 번창하고 적잖은 재산도 모을 수 있었다.
사업에 자신이 생긴 강석진은 하면 된다는 불굴의 신념으로 1940년대에 들어오면서 사업의 확장을 통한 한 단계 높은 도약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리하여 범일동에 훨씬 넓은 공장부지를 매입하여 여기에 동명제재소를 이전하기로 하였다.


동명목재상사와 목재왕, 수출왕, 납세왕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전시체제하에 온갖 규제와 핍박으로 목재사업도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강석진은 여기에 꺾이지 않고 새로 매입한 범일동의 2천여 평 부지에 공장을 짓고 생산시설을 갖추어 가고 있던 중 1945년 8·15의 광복을 맞게 되고, 그해 11월에 동명제재소를 범일동으로 이전하였다. 범일동에 제재소의 이전을 마치자, 광복 후의 극심한 사회적 혼란의 와중에서도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면서 새로운 결심과 각오로 사업을 구상하고 추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결과 사업의 폭을 넓혀 여태까지 해오던 제재업은 물론 그 위에 종전까지 고려하지 않고 있던 합판 생산에도 눈을 돌려 이를 위한 새로운 기계를 설치하고 설비를 갖추어 나갔다. 이리하여 1949년에는 종래의 동명제재소를 동명목재상사(東明木材商社)로 개칭하고 사장이 되어 본격적인 가동(稼動)에 들어갔다. 당시 강석진이 합판 생산에 눈을 돌린 것은 첫째, 8·15 광복으로 국토가 분단되고 일본과의 관계가 단절됨에 따라 원목의 공급이 원활치 못해 목재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제재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나무의 자투리나 토막을 버리지 않고 모아서 이것으로 합판을 만들면 자원의 손실과 낭비를 막을 수 있는 동시에 원가를 절감할 수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에 아직도 일반화되지 않고 있던 합판을 생산하게 되면 반드시 수요자들에게 호평을 받아 잘 팔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예상은 적중하여 합판의 수요가 차츰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때 민족의 대 비극인 6·25가 터지고 말았다.

동명목재상사 전경(1973. 06)동명목재상사 전경(1973. 06)

1953년 7월에 3년여에 걸친 전쟁이 일단 휴전 상태에 들어갔으나, 온 국토는 초토화(焦土化)되고 전국의 모든 시설이 불탔거나 파괴되고 말았다. 이제 국가와 사회의 관심은 재건과 복구에 쏠려 있었다. 이에 따라 재건과 복구를 위한 목재와 합판의 주문이 전국에서 쇄도(殺到)하여 동명목재상사의 200여 종업원들은 밤낮 없이 제품 생산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동명목재상사의 사운(社運)은 날로 융성해지고, 사세(社勢)는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만 갔다.
1950년대의 말기에 접어들면 제품의 수요가 더욱 불어남에 따라 현재의 시설 규모와 생산 설비로는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강석진은 우선 공장 이전 계획을 서둘러 수립하고 그 부지의 물색에 나섰다. 그가 생각하는 공장 부지의 조건은 각 지방에서 수송되는 원목의 하역(荷役)과 공장까지의 운반이 용이하고, 원목을 쌓아 둘 수 있는 넓은 저목장(貯木場)을 만들 수 있는 곳이어야 하며, 앞으로 해외에서 원목을 수입해 오는 것이 불가피한 점을 감안할 때 원목을 싣고 오는 선박의 접안(接岸)이 용이한 곳이라야 했다. 이러한 조건을 두루 갖춘 것으로 보고 선정한 곳이 바로 남구 용당동 바닷가에 있는 60여 만 평의 광대한 부지였다.
강석진은 1960년 용당동의 새 부지에 우선 제1 합판공장을 세워 범일동 공장의 모든 시설과 설비를 이곳으로 옮기는 동시에 일본과 독일로부터 최신 첨단 기계를 도입하여 새로운 생산 시설을 갖추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여 종래의 것과는 확실히 다른 훌륭한 제품을 생산하여 시장에 내 놓으니, 동명목재상사의 제품은 날개가 돋친 듯이 팔려나가 늘 생산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따라서 1967년에는 제2 합판공장과 제1 가공합판공장이 세워지고, 1968년에는 제2 가공합판공장, 1974년에 제3 합판공장과 화학가공공장 등이 연달아 세워지니 공장의 연 건평이 5만 평이 넘었고, 종업원의 총 수가 7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합판의 1일 생산량이 수십만 매를 기록하여 이제 강석진은 누구나 인정하는 목재왕국의 왕좌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한편 강석진이 경영하는 동명목재상사는 이미 1959년부터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원목[lauan]을 수입하여 질 좋은 합판을 계속 생산함에 따라 그 명성이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져서 마침내 1961년에는 미국 상사(商社)의 주문을 받아 대미(對美) 수출이 시작되었다. 이제 동명목재상사는 좁은 국내 시장이 아니라, 넓은 세계시장으로 뛰어 든 것이다. 이로부터 해외 수출은 해마다 늘어나서 1968년에서 1971년까지 4년간 연속 전국 수출액 1위를 차지하고 수출 최고상을 받아 수출왕의 영예를 얻는 동시에 금탑산업훈장, 은탑산업훈장, 동탑산업훈장을 모조리 휩쓸고 대한민국 국민포장까지 받는 광영을 누리게 되었으며, 1970년대의 후반에는 수출 실적 1억 달러를 무난히 돌파하였다.
또 강석진은 대기업의 경영주로서 개인적인 수입과 소득도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1968년에 그가 납부한 세금이 9천 1백 23만 9천 원이나 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낸 사람으로 개인부문 납세왕으로 선정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동명목재상사를 설립해서 크게 성공하여 명실상부한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강석진은 동명목재를 모기업으로 하고 여기에 1974년부터 1979년까지 5년 사이에 동명산업(주), 부영실업(주), 동명수출포장(주), 동명제지(주), 동명해운(주), 동명개발(주), 동명중공업(주), 동명식품(주) 등 여러 회사를 차례로 설립하여 동명그룹을 탄생시켰다. 동명그룹의 탄생은 곧 고용인구의 증가에 따르는 실업률의 감소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데 동명그룹 산하의 모든 기업은 단 하나도 부산을 떠나 딴 곳에 세운 적이 없고, 또 다른 곳으로 이전한 적도 없이 오로지 부산을 지키는 토박이 기업이기를 고집하였으며, 그룹 총수인 강석진 자신도 거처를 부산에 두고 부산에서만 살았다. 이것은 지방에서 사업에 성공하여 돈을 벌면 무조건 서울로 진출하려던 당시의 시대 풍조와는 대조가 되는 것이었다. 이는 강석진이 평소에 “오늘의 동명을 있게 한 것이 부산이요, 부산이 있었기에 오늘의 강석진이 있게 되었으니 내 어찌 부산을 잊을 것인가” 한 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을 키워 준 부산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애착심이 누구보다도 강했기 때문이다.


사회봉사활동과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업이 더욱 번창하여 엄청난 기업 이윤을 올리게 되자, 이제 강석진은 단순히 자기 기업을 위한 활동 범위를 벗어나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 참여 할 수 있는 정신적 물질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강석진은 1962년에 부산 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회장의 중책을 맡은 그는 내 고장 부산 사람들이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의 활성화에 전력을 경주할 각오로 직무에 임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부산 상공회의소 회장을 여러 차례 연임하여 1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직무를 수행하면서 부산은행을 비롯하여 부산투자금융, 부산항만부두관리협회를 설립했는가 하면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부산데파트를 신축·개장하는 등 부산 경제 발전에 헌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당시 부산은 전국 제2의 도시이면서도 그 위상에 걸맞지 않게 고등법원과 고등검찰청이 없어 대구에까지 올라가야 하는 불편을 겪어야만 했다. 이에 강석진은 고법(高法)과 고검(高檢)의 부산 신설 추진운동에 앞장서서 적극 활동한 결과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여 부산의 위상 제고(提高)는 물론 시민들에게 많은 편익을 제공하였다. 또 그는 1968년부터 5년간 자기 자녀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부산대학교 기성회장직을 맡아 대학의 발전에 여러 모로 힘이 되어 주었고, 1970년에는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 사이의 정기운항선인 부·관(釜·關)페리호를 취항토록 하는 데도 적잖은 힘을 실어 주었다.
또 강석진은 1967년에 대한민국 팔각회(八角會)를 창립하여 총재가 된 후로 10여 년간 그 자리에 있으면서 시민들에게 확고한 국가관과 철저한 반공이념의 고취를 통한 호국사상의 고양(高揚)에 온 힘을 기울이는 동시에 동남아시아 반공 국가간의 친선(親善)과 유대(紐帶)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74년에 중화민국의 중화학술원으로부터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하였다.

대만 중화학술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 광경(1974년)대만 중화학술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 광경(1974년)

한편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동시에 사단법인 부산 불교신도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열악한 여건 아래서도 나라를 지키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 향토의 육(陸)·해군(海軍) 장병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또 군경(軍警) 유가족의 원호(援護)와 국가 방위 성금의 헌납에도 솔선수범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또 거액의 사비를 들여 경남 진해 해군사관학교에 호국사(護國寺), 부산 군수기지사령부의 장병들을 위해 남구 광안동에 금련사(金蓮寺)를 지어 주기도 하고, 용당동에 동명불원을 지어 부산시에 헌납하기도 하였다. 그가 이와 같은 일을 한 것은 단순히 부산 불교신도회장으로서 포교의 한 수단으로 택한 일이라고 하기보다는 그가 평소에 갖고 있던 국가의 안보를 염원하는 호국정신의 발로로 보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강석진의 많은 사회 활동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B.B.S 운동 부산 연맹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B.B.S운동은 불우 청소년의 선도와 보호를 목적으로 전개된 운동으로서 미국이 주축이 된 범세계적인 운동이며, 이 운동의 연맹체는 하나의 봉사단체인 동시에 자선단체였다. 그런데 1960년대 초에 결성된 부산연명이 한국 B.B.S운동 연맹의 시초가 된다. 1964년에 B.B.S 부산연맹의 회장이 된 강석진은 1980년에 사임할 때까지 불우 청소년의 선도와 보호운동에 혼신의 힘을 다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숱한 업적을 남겼다.

B.B.S.회관(준공 1965. 12. 28) 강석진이 공사비 1,900만원을 단독 부담, 설계·공사를 감독한 건물B.B.S.회관(준공 1965. 12. 28)
강석진이 공사비 1,900만원을 단독 부담, 설계·공사를 감독한 건물

그는 회장에 취임하자, 우선 불우 청소년들에게 자립정신을 길러 주고 자활 의지를 복돋워 주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제1차로 불우 청소년 200명을 선정하고 이들에게 면면이 적잖은 액수의 돈을 생업자금으로 지급하는 동시에 이 운동에 동조하는 각계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이들의 취업을 주선해 주었으며, 그 후로는 자립의 기틀을 마련하고 자활의 의지를 깨우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 소요된 많은 경비를 회장 자신의 사재(私財)로 충당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는 계속 거액의 사재를 털어 부산진구 양정동에 직업소년회관을 짓고, 동구 좌천동에는 규모가 큰 B.B.S부산연맹회관을 건립하였다. 또 연맹 산하 조직으로 대학생 지도위원회를 만들어 불우한 청소년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음으로써 이들을 보살펴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힘쓰게 하는 한편 연맹회관에 야간 학교강좌를 개설하여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리하여 소정의 과정을 이수한 자에게는 검정고시를 치른 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시켜 학비 전액을 보조해 주었고, 그 중에서 성적이 우수한 자는 대학에 진학시켜 주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하다 보니 그의 회장 재임 중 B.B.S운동을 통해 생업자금이나 학비 보조를 받은 사람은 무려 2만 5천 2백 25명에 달하였고, 그 금액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것은 돈 많은 부자라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강석진 같은 자선가가 아니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대통령과 대한적십자사총재를 비롯하여 사회의 여러 공공기관으로부터 훈장과 포장, 그리고 수많은 감사장을 받았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동명문화학원 전경(2004년)오늘날의 동명문화학원 전경(2004년)

1977년 강석진은 어느덧 고희(古稀)를 맞았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는 마지막으로 일생에 가장 보람있는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을 통한 육영사업(育英事業)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같은 해에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東明文化學園)을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많은 재산을 아낌없이 내어놓고 학교의 설립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78년에는 6개 과에 신입생 640명을 모집하는 동원공업전문대학(현 동명대학)을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79년 10·26 이후 정권을 잡은 신 군부 세력은 정경유착에서 발생한 비리와 부조리를 척결하고 악덕 기업인을 없앤다는 명분 아래 강석진을 반사회적 악덕기업인으로 몰아 동명목재상사를 비롯한 그룹 산하의 모든 기업을 해체 도산시키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 뿐이었다. 이 후 강석진은 사회의 모든 활동을 접고 오로지 자신이 설립한 학원의 발전상을 지켜보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내가 왜 악덕 기업인이란 말인가”라는 탄식의 한 마디 말을 남긴 채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나니, 때는 1984년 10월 2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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