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글자크기

동구인물

상세보기 - 동구인물, 제목, 내용, 파일, 카테고리, 조회수, 작성일, 작성자등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제목 일신여학교 출신 소설가 김말봉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7.10.30 조회수 2355

일신여학교 출신 소설가 김말봉

일신여학교 출신 소설가 김말봉
  • 김말봉(1901-1962, 金末峰)
  • 동구 좌천동 일신여학교 출신 - 동기생 박순천, 박시연 등
  • 소설 찔레꽃 - 작품의 산실 초량 연화동
  • 장편소설 밀림 - 작품의 산실 좌천동

학업과 소설가로서 문단 데뷔

김말봉은 부산시 중구 영주동에서 김해 김씨 김윤중(金允中)의 5남매 중 막내딸로 1901년 4월 3일(음력)에 태어났다. 본명은 말봉(末鳳)이었다. 그는 1914년부터 동구 좌천동에 있었던 일신여학교에 다녔다. 이 일신여학교는 호주 장로교 선교회 여자 전도사가 중심이 되어 1895년 10월에 세운 사립학교로 처음은 3개년 과정의 초등학교였다가 1909년에 중학교 과정인 3개년, 고등과를 병설하였고, 그 3개년 고등과는 1915년 4년제가 되었다. 김말봉은 고등과 3년을 수료했다. 그때의 학교 위치는 지금도 벽돌교사(1905년 신축)로 남아 있는 좌천동 768번지이다.
이 일신여학교는 1925년 6월 동래구 복천동으로 옮겨져 동래일신여학교가 되고, 1940년에는 동래고등여학교라는 이름이 되었는데 이 학교가 지금의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이 학교는 1987년에 금정구 부곡동으로 옮겼다.
김말봉이 좌천동의 일신여학교에 다닐 때의 동기생으로는 박순천(朴順天), 박시연(朴時淵) 등이 있었다. 박순천은 제 2·4·5·6·7 대 국회의원이 되고 민주당 총재, 신민당 고문 등을 역임한 여류 정치가로 김말봉이 뒷날 사회사업으로 공창(公娼)폐지운동을 할 무렵 같은 동기적 입장으로 여성권익 신장을 위해 활동한 바도 있었다.
동기생인 박시연은 뒷날 모교인 일신여학교 교사가 되었고, 1919년 일신여학교가 3?1독립운동 시위를 경남에서 맨 먼저 벌였을 때 교사로서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를 지도했고 그로 인해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 바도 있었다.
박순천이 쓴 [나의 학창시절]이란 글이 [동구향토지](東區鄕土誌 : 1987년 刊)에 실려 있는데 그에 의하면 그 당시는 일제강점기가 되어 일본어를 국어라 했는데, 국어라 하지 않고 일어(日語)라 하여 일어를 가르치려 들어 온 여선생은 학생들의 놀림을 받고 울고 나가기 일쑤였다고 했다. 그럴 때면 김말봉이 일본인 일어 선생을 놀려주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김말봉은 일신여학교 3학년을 수료한 뒤 서울의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 3학년에 편입(1917)하여 1918년에 4년 과정을 졸업하였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1919년에 황해도 재령(載寧)의 명신학교(明信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더 배워야 하겠다는 의욕으로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타카네의숙[高根義塾]에 들어가 1923년에 졸업하자, 선진문물을 배우려면 영어를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그 당시의 명문 교오토[京都]의 도오지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들어가 1927년에 졸업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배울 수 있는 한도까지 배우고 귀국했다.

백산 안희제선생백산 안희제선생

귀국한 그는 1929년에 중외일보(中外日報)기자가 되었다. 이 1929년은 부산에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경영하여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해 오던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당하던 시기로 백산은 일경을 피하여 백산무역회사를 해산하고, 재정난으로 휴간 중인 서울의 [중외일보]를 인수 복간하여 민족정기를 일깨우려 할 때였다. 김말봉이 복간되는 중외일보 기자가 된 것은 백산 안희제의 뜻에 동조한데 있었다.
복간을 본 중외일보는 그 당시 다른 일간지는 6면(面)인데 중외일보는 조석간(朝夕刊) 4면씩 8면 발행의 의욕을 보였다. 그 의욕에는 일제(日帝)가 가진 식민지정책을 정론으로 비판하려는 의도가 컸다. 그러나 지나친 의욕을 보인 중외일보는 재정난과 일제의 기사내용 간섭을 견디다 못해 1931년 9월 폐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1년 10월, 노정일(盧正一)은 중외일보를 [중앙일보]로 이름을 바꾸어 속간하고 김말봉은 경영자가 바뀐 중앙일보 기자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 김말봉은 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보옥(步玉)]이란 필명으로 단편소설 [망명녀(亡命女)]를 투고하여 이것이 1932년 1월 당선됨으로서 소설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김말봉은 이에 앞서 1925년 4월18일~25일에 걸쳐 동아일보의 [신춘문단]에 [시집살이]를 발표한 바 있었으나 그것은 공식적인 문단데뷔 절차를 밟기 전의 일이 되어 그의 문단데뷔는 1932년의 [망명녀]를 잡고 있다.
1932년이라면 우리나라로서는 현대문학 특히 현대소설로서는 초창기에서 발전기로 나아갈 때다. 이때 부산으로서는 일본 유학생으로서 현대문학 발흥의 기운은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나 실제 작가, 시인으로 공식적인 등단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점으로 보아 [망명녀]로 등단한 김말봉이 부산출신으로서는 현대문학 첫 등단자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초기의 여류소설가로는 김말봉과 거의 같은 시기에 출발한 박화성(朴花城)이 1925년 조선문단에 [추석전야]가 추천된 바 있고, 강경애(姜敬愛)가 1931년 혜성(慧星)에 [어머니와 딸]을 발표한 바 있고, 최정희(崔貞熙)가 1932년 시대공론에 [식대(食代)]를 발표한 바 있을 정도였다.
김말봉은 1933년 부산 영주동 출신의 전상범(全尙範)과 결혼하여 고향 부산으로 돌아와서 생활하며 1934년에 신가정에 단편소설 [편지] 1935년에 신가정에 [고행(苦行)] [요람]등을 발표했다.


장편소설『밀림(密林)』시대

김말봉이 대중소설의 가능성을 보인 것은 193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었던 설의식(薛義植), 학예부장 서항석(徐恒錫)의 주선으로 장편소설 [밀림(密林)]을 1935년 9월 26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한데 있었다.
이 밀림을 쓸 때 김말봉은 부산에서 살고 있던 시기로 밀림의 산실(産室)은 그의 거처인 동구 좌천동이었다. 그래서 이 밀림을 서울의 동아일보 지면에 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김말봉이 며칠 동안 연재할 원고를 쓰면 그 원고 묶음을 광복동에 있는 에덴다방으로 가져갔다. 그 에덴다방은 뒤에 제1다방으로 이름이 바뀐 적도 있지만 일제강점기인 그 당시는 광복동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다방이었다. 그 경영주는 동아일보 부산지사장으로 있은 강대홍(姜大洪)이었다.
김말봉이 며칠 동안 실을 원고를 써서 에덴다방으로 가져가면 삽화를 그릴 한무숙(韓戊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한무숙은 서울출신이긴 해도 그의 아버지가 경상남도 도청의 고급관리로 있었다. 그때의 경상남도 도청은 부산에 있었다. 한무숙은 아버지의 근무지가 부산이어서 부모와 함께 부산에 있으면서 부산봉래보통학교를 1932년에 졸업하고 부산고녀(당시는 부산고등여학교라 해서 부산고녀라 했다)를 다닌 4학년 학생이었다. 그때의 나이 17세, 그 17세의 고녀 학생인 한무숙이 김말봉의 소설원고에 나타나는 내용을 따라 삽화를 그려 에덴다방으로 다시 가져갔다. 그러면 그 원고에 곁들인 삽화와 원고는 다방 경영자이자 동아일보 지국장인 강대홍을 통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한무숙의 그림솜씨도 작품에 걸맞게 좋았다고 한다.
이 자리를 빌어 삽화를 그린 한무숙의 얘기를 잠깐 하면, 한무숙은 1918년생이었다. 한무숙은 처음은 그렇게 화가지망생이었고 그 당시는 일본인 여학생만 다니는 부산고녀를 다녀서 학교에서는 우리말(당시는 조선어) 수업은 없어서 우리글은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말봉의 소설 삽화를 그리는 동안 우리말과 우리 소설에 경도되어 우리글 우리문학에 심취하여 1942년 신시대(新時代) 장편소설 모집에 [등불 드는 여인(女人)]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부산의 국제신문의 전신(前身)인 산업신문이 1948년 장편소설을 모집할 때는 [역사는 흐른다]가 당선되었지만 그 산업신문이 폐간되자 태양신문(太陽新聞)에 그 [역사는 흐른다]가 연재되었다.
그 뒤 [램프] [내일 없는 사람들] [아버지] 등 수작을 발표하면서 한국일보에 장편소설 [빛의 단계]를 연재하고, 여상(女像)에 장편소설 [석류나무집 이야기]를 연재하는 등 많은 작품을 썼고 1957년에는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1990년에는 학국소설가협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부산에 연고를 가진 소설가로 김말봉의 영향을 입은 부산의 두 번째 여류소설가는 한무숙이라 할 수 있다.


장편소설『찔레꽃』시대

첫 번째 장편소설 [밀림]의 신문연재로 각광을 받은 김말봉의 두 번째 장편소설은 조선일보에 1937년 3월 31일에서 10월 3일까지 연재한 [찔레꽃]이었다.
이 [찔레꽃]에 대해 세계문예대사전(성문각 1975년 刊)이 기술한데 의하면 김말봉의 이 연재는 통속소설가로서 일약 저널리즘의 스타가 되게 했다. 한인택(韓仁澤)이 [선풍시대(旋風時代)]로 데뷔한 것이나 심훈(沈薰)이 당시 브나르드운동을 반영한 [상록수(常綠樹)]로 데뷔한 것과는 달리 순수한 흥미중심의 통속성을 가지고 등장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위에서 흥미중심의 통속성이라 한 말은 순수소설에 반대하는 대중소설로 예술성보다 독자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흥미본위로 엮어나가는 것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까다로운 문체를 피하고 스토리나 플롯을 안이하게 펼치는 수법이다. 그래서 김말봉의 소설은 신문연재에 맞아들어 크게 인기를 얻었을 분 아니라 신문소설이 가지는 대중성을 확보했다. 김말봉의 대표작을 이 [찔레꽃]에 두고 있는데 그 줄거리를 참고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소설의 젊은 여성주인공 안정순은 이민수의 애인이었다. 정순은 은행장인 조만호씨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은행장 조씨는 아내가 오랫동안 병석에 있어서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런 조씨는 젊은 가정교사 정순이에게 사랑을 느끼고 접근하려 했다. 그 반면 조씨의 아들 경구도 정순을 마음속으로 그리게 된다.
이러할 때 정순의 애인 이민수가 정순이 가정교사를 하고 있는 조씨집을 몇 차례 다녀간 이후 조씨의 딸 경애가 민수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사이 조씨의 아내가 죽자 조씨의 집 침모가 침모 자신의 딸을 후처로 만들기 위해 조씨의 방으로 들여보냈고 조씨는 침모의 딸과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런 조씨에게는 가까이 지내던 옥란이란 기생이 있었다. 조씨는 그 기생에게 아내가 죽으면 후처로 삼겠다는 언약을 한 바 있었다. 기생 옥란은 이제는 조씨의 후처가 되겠다는 기대를 걸고 있는데 조씨와 침모의 딸과의 관계를 알자 기생인 옥란이 조씨의 방으로 숨어들어 있다가 조씨가 침모의 딸과 정사를 치르는 순간 칼로 침모의 딸을 찔러 죽인다. 가정교사 정순에게 살인의 누명이 돌아왔다. 누명을 썼던 정순은 그제야 모든 사실을 알고 그 집을 나오게 되는 줄거리다. 이는 찔레꽃처럼 순박한 정순이 그 자신은 모르는 가운데 일어난 남녀간의 애욕과 애증(愛憎)에 환명을 느끼는 인간사의 일면을 보인 것이다.
이 [찔레꽃]은 얽히고 설킨 애정관계가 하루하루 짧은 지면으로 연재되는 가운데 독자는 흥미를 가지게 되어 신문소설이 가진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 [찔레꽃]이 연재될 때는 김말봉이 첫때 남편 전상범과 사별하고 재산가이며 무정부주의자였던 이종하(李鍾河)와 1937년에 재혼하여 동구 초량동의 연화동(오늘날의 초량1동 지역)에 살 때였다. 그러니 조선일보의 [찔레꽃]도 김말봉이 부산에 살 때이고 그 작품의 산실(産室)은 초량의 연화동이었다.
김말봉이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발표한 그 이후부터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우리말로 출판될 출판물의 허가는 일체 없어졌다. 기존 출판지지(紙誌)에 대한 검열은 극도로 심해졌다. 그 검열로 폐간이란 마지막 법적제재가 내려졌다. 1940년 8월 10일에는 우리의 두 언론기관으로 남아 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폐간되었다. 우리말로 발간되던 잡지와 문예지도 폐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인지도 단행본 출판도 불온서적으로 금서(禁書)가 되었고, 우리글을 읽는 일마저 불온화로 낙인이 찍혔다. 우리 문인들의 암흑기였다. 김말봉도 우리글을 쓸 수 없게 되어 붓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에서 글을 못 쓰는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광복 후에 쏟아진 작품들

부산피난시절(1951.9, 왼편부터 김말봉, 유치환, 한 사람 건너 조연현, 윗줄 왼편에 김광주, 김동리)부산피난시절(1951.9, 왼편부터 김말봉, 유치환, 한 사람 건너 조연현, 윗줄 왼편에 김광주, 김동리)

김말봉은 광복을 보자 부산에서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작품활동이 본격화되어 갔다. 1945년 부인신문(婦人新聞)에 장편소설 [카인의 시장(市場)]을 발표했다. 그는 작품활동 이외에도 공창(公娼)폐지운동에 앞장서고 박애원(博愛院)을 경영하는 등 사회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1949년에는 하와이를 시찰하였다가 1950년의 6·25한국전쟁이 일어난 2일 뒤에 귀국하였다. 9·28수복 때 상경하였다가 다시 가족과 더불어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에서 피난 온 많은 문인들을 물심 양면으로 도왔다.
1952년 2월에는 서울신문에 [태양의 권속(眷屬)]을 연재하고, [희망]지에 [파도에 부서지는 노래]를 발표했다. 1952년 9월에는 베니스에서 개최한 세계예술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53년에는 영남일보에 [새를 보라] [여성계]에 [바람의 향연], 1954년 3월 26일에서 9월 13일까지는 조선일보에 [푸른 날개]를 연재하고 [학원(學園)]지에 [파초의 꿈] [새가정]에 [옥합을 열고]를 발표했다.
1955년에는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서 작품소재를 실제 경험으로 얻었다. 55년 3월 15일에서 7월9일까지 국제신보에 [찬란한 독배(毒盃)]를 연재하고, 1956년에는 11월 28일에서 57년 9월16일까지 조선일보에 [푸른 생명]을 연재하고 [희망(希望)]지에 [길]을 발표했다. 1957년에는 [여원(女苑)]지에 [방초탑(方肖塔)] 국제신보에 [푸른 장미(57. 6.15~12.25)]를 연재하고 한국일보에 [화관(花冠)의 계절(57.9~58.5)]을 연재 했다.
1958년에는 연합신문에 [사슴(58.6~58.12)]을 연재하고, [주부생활]에 [행로난(行路難)] [학원]에 [광명한 아침] [보건세계]에 [아담의 후예] 조선일보에 [환희(58.12.15~59.6.21)]를 연재했다. 1959년에는 부산일보에 [제비야 오렴(58.12.1~59.7.19)], 대구일보에 [장미의 고향], 연합신문에 [해바라기(59.7~60.2)]등을 발표했다.
이 이외 단편소설로 연합신문에 [성좌(星座)는 부른다(49.1)], [신여성]에 [낙엽과 함께(49.3)] [문예]에 [망령(52.1)] [문예]에 [바퀴소리(53.2)], [전선문학]에 [처녀의 장(章:53.2)], [현대문학]에 [女心(55.2)], [신태양]에 [식칼 한자루(55.2)], [여원]에 [사랑의 비중(56.4)], [현대문학]에 [이브의 후예(60.4)] 등 그의 작품은 계속 수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김말봉의 작품세계

부산원예고에서 문학 강연후 직원들과 함께(1959년 경, 앞중 중앙의 한복차림이 김말봉, 그의 왼쪽이 소설가 한무숙)부산원예고에서 문학 강연후 직원들과 함께(1959년 경, 앞중 중앙의 한복차림이 김말봉, 그의 왼쪽이 소설가 한무숙)

김말봉의 작품세계는 광복 이전은 남녀간의 애욕(愛慾)의 문제로 다루었으나 광복 이후는 인간의 애욕문제가 가미된 사회문제를 다룬 것이 특이 하다. 광복이전의 작품을 그의 제1기 작품이라 하고, 광복 이후의 작품을 제2기 작품이라 하면 제1기의 대표작품은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조선일보에 연재한 [찔레꽃]이라 할 수 있고, 제2기의 대표작품은 역시 조선일보에 연재한 [생명(生命)]이라 할 수 있다.
제2기의 [생명]의 주인공 역시 여성을 등장시켰지만 부모도 없고 피를 뽑아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한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내용으로는 주인공 창님이 동창생인 정미의 아버지 김한주 사장이 저지르는 부패성과 사업가가 가진 치부(恥部)를 드러내고 있다. 이 고발적 수법은 당시가 가진 사회성의 일면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보아 김말봉의 광복전 제1기 문학은 개인이 가진 애정이 애욕으로 나아가는 서구식 사조를 받아들였지만 광복 후의 제2기에서는 사회공동체에 눈을 돌려 사회정의에 초점을 맞추었다. 신문소설이 가진 극적구성으로 대중소설의 개척자로 일컬어진 김말봉에 대해서는 예술성과 인간을 탐구해야하는 문학적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순수문학 옹호자들이 비판을 하면 그는 스스로 통속작가임을 자처하면서 순수문학 옹호자를 순수귀신(純粹鬼神)이라고 통박하기도 했다. 작가는 인간의 현실적 상황에 눈을 돌려 대중과 함께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그는 영문학을 전공한 경력 때문인지 서구식 대중성에 영향한 바 컸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1957년에는 우리나라 그리스도교 최초의 여성 장로가 되었다. 그는 1962년 2월 9일 폐암으로 6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저서로는 장편소설로 [찔레꽃]을 인문사가 1939년에 낸 바 있고 1948년에는 합동사서점에서 낸 바 있다. [밀림]은 영창서관에서 1942년에 낸 바 있고 공동문화사가 1955년에 낸 바 있다.
[화려한 지옥(문연사, 1952년)], [태양의 권속(삼신출판사, 1953)], [푸른 날개(형설출판사, 1954)], [별들의 고향(정음사, 1956)], [생명(동인문화사, 1957)],[벌레 많은 꽃(대일출판사, 1977)] 등이 있고, 단편선집으로 [꽃과 뱀(문연사, 1957)] 등이 있다.


목록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제 4유형 출처표시 + 변경금지 + 상업적이용금지 본 공공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 조사 폼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행정문화국 문화체육관광과
  • 문의전화 051-440-4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