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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초량 박외과 출신 정치인 박기출(朴己出)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7.10.30 조회수 2067

초량 박외과 출신 정치인 박기출(朴己出)

초량 박외과 출신 정치인 박기출(朴己出)
  • 박기출(1909-1977, 朴己出)
  • 의료인으로 출발 (초량 광본외과 - 해방 후 박외과)
  • 구봉산 자락 새한의숙, 새한중학교 설립
  • 제7대 국회의원 당선 - 부산동구

의료인으로 출발(초량 광본외과 - 해방 후 박외과)

열강의 각축과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정치적 박해로 얼룩진 일생을 마감한 비운의 한 진보주의자가 바로 부산출신 박기출(1909-1977, 朴己出)이다.
우리사회에 민주주의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좌우익 갈등과 투쟁, 일인독재의 횡포 속에서 철저하게 희생자로 살다간 그는 분명 민족주의를 신봉하고 실천한 정치인으로 분류되지만 의료인으로서 또 체육회와 한글학회 그리고 교육과 언론에도 업적을 남긴 이색정치인이다. 박기출을 이야기하자면 파란만장한 그의 정치인생을 말하기 전에 의사로서의 면모부터 살펴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박기출은 1909년 4월 28일 부산 서구 부민동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박주성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4년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업(父業)인 의업(醫業)을 계승하기 위해 일본 동경의학전문학교 오늘날의 동경의과대학에 입학한다. 1935년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하여 서복동(徐福童)씨와 결혼을 하고 부산부립병원에 근무하면서 1942년 일본 구주대(九州大)에서 재차 수학, 의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부산출신 의사 중 3번째로 일본서 학위를 받은 인물로 『부산의사(釜山醫史)』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1943년 부림병원을 그만 두고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광본외과(光本外科)를 개업했다가 해방과 동시에 박외과(朴外科)로 병원이름을 바꾸었고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병원의 문을 닫게 된다. 이에 앞서 해방직후인 1946년 박기출은 미군정(美軍政) 부산지방 초대 후생국장을 맡았으나 8개월 만에 미군정과의 의견충돌로 사임한다.
당시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여 그 피해가 극심했다. 미군정청은 일본으로부터 돌아오는 귀환동포들에게 검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입국시키고 있었다. 거기에다 미군정청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병원(敵産病院) 불하문제로 박기출과 심각한 의견대립을 보였다. 박기출은 재산과 기반이 없는 귀환동포의사들에게 넘겨줄 것을 주장했으나 미군정청은 이미 개업한 기득권층의 부유한 의사들에게 불하해주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박기출은 미군정청 후생국장직을 사임하고 개업하면서부터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나아가서는 정치활동에 나서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괴정에서 의원을 개업하던 중 불치의 병환으로 가산을 정리하여 부용동으로 이사한 뒤 할머니가 양조업을 시작했다.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일본이 대동아전쟁에 징용하기 위하여 식량 주류 의류 등을 통제하면서 그 집안의 양조장도 징발 당하고 만다. 그때 그의 할머니가 병원을 새로 지어 주었고 박기출은 개업하여 문전성시를 이루는 등 다방면으로 유능한 외과의사로서의 명승을 얻게 된다.
박기출은 성격이 활달하고 추진력이 강한데다가 웅변가로서 주위의 신망이 두터워 경남의사회회장, 대한의사협의회의장 등 활발한 활동에 나선다. 대한의사협의회 의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부산한글학회 부산체육회 등 회장이 된다. 그런 과정에서 주위에서는 그의 사무처리와 명석한 판단력과 박력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박기출은 부산에서 상공일보(商工日報)를 경영하여 언론을 통한 사회교화에도 기여하는 한편 한국전쟁 중 조국의 파괴와 절망 속에서 민족이 나아갈 길을 찾고자 하는 뜻에서 사재를 털어“새한의숙”을 열어 수업료를 받지 않는 남녀공학의 새한중학교를 초량동 구봉산 자락에 세웠다. 새한중학교는 진보당 사건의 와중에 이승만정권의 억압과 고난에 견디다 못해 제 삼자에게 넘어가고 만다.
그가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은 한글학회에 관여하면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집의 문패에 “박기출” 혹은 “朴己出”이라 쓰지 않고 “밝기출”이라고 써 붙였다. “밝”이란 이두로 표현된 것으로써 “밝은 곳 즉 해가 뜨는 곳에서 시작된 민족”이라는 뜻이라는 주장이다.


부통령 후보로 지명

의료인 박기출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동기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는 데 있었다. 1942년 한글학자이자 민족주의자인 이극로(李克魯)와 만나면서 박기출의 인생역정은 정치입문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발길이 옮겨진 것이다. 정당에 가입하게 되고 한독당과 진보당 사회대중당 등의 주인공으로 가장 박해받는 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이극로가 창설한 건민회(健民會)에 박기출이 가입, 경남위원장이 된 해가 46년, 이때부터 박기출은 중앙의 정치무대를 오가면서 김규식(金奎植) 조봉암(曺奉岩) 등 민족주의 진영의 정치인들과 교류가 시작된다. 이 무렵 민족자주연맹에 관련된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과도 정치적 친분관계를 맺게 되고, 이로써 향후 박기출의 정치성향은 민족적 진보주의자로 굳어지게 된다.
해방 후 좌우의 극한대립으로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남북통일을 기대하던 민족진영은 좌우합작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 좌에 가깝던 여운형(呂運亨)과 가깝던 김규식(金奎植)이 각각 좌우의 대표가 되어 합작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들 두 지도자가 모두 자신들의 지지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데다 46년 제1차 미소(美蘇)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설상가상으로 여운형이 암살당함으로써 민족통일은 고사하고 좌우합작운동마저 궤멸될 위기에 직면한다.
이때 김규식은 좌우편향을 배제하고 민족자주노선을 지향한다는 기치아래 중간파에 속하던 19개 정당 및 사회단체를 결집,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을 결성한다. 민족자주연맹에는 김규식을 비롯, 원세훈(元世勳), 안재홍(安在鴻), 최동오(崔東旿), 김병로(金炳魯), 홍명희(洪明熹), 이극로(李克魯) 등이 참가했으며 박기출은 건민회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민족자주연맹 경남위원장을 맡는다.

1950년대 선거용 짚차1950년대 선거용 짚차

1950년 5월 실시된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 박기출은 부산 동구에서 출마한다. 그러나 임정요인이며 혁신계의 핵심인물이었던 장건상(張建相)이 같은 선거구에서 출마하게 되자 박기출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각오로 출마를 포기하고 오히려 장건상의 선거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따라서 장건상은 옥중 당선된다. 당시의 선거상황은 경쟁률이 10.5대 1에 이를 정도로 후보자가 난립했는데 결과는 대한국민당과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이 각각 24석을 차지했을 뿐 무소속 출마자가 1백 26명이 당선되는 혼란상을 보이고 있었다.
총선 1개월 만인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대적인 좌익분자 검거령이 내려지고 8월 28일 박기출도 경찰에 구금되고 만다. 전쟁을 겪으면서 이승만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정권의 탄압으로 진보진영의 세력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정권이 1954년 9월 사사오입개헌으로 영구집권체제를 갖추게 되자 민국당과 무소속 국회의원 등이 호헌동지회를 만들고 여기에서 민주당(民主黨)과 진보당(進步黨)이 탄생하게 된다. 조봉암(曺奉岩), 서상일(徐相日), 장건상(張建相), 윤길중(尹吉重), 신도성(愼道晟) 등이 참석하여 12월 22일 진보당(進步黨)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조봉암, 서상일, 박기출, 김성숙, 윤길중 등 12인을 발기인으로 선출했다. 이듬해 5?15 제3대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진보당추진위는 대통령후보에 조봉암, 부통령후보에 박기출을 지명했다.
이때 민주당은 대통령후보에 신익희(申翼熙), 부통령후보엔 장면(張勉)을 내세웠다. 진보당과 민주당은 야권연합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 4월 27일 양당의 정부통령 후보 4인이 회담을 갖기로 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장면이 불참하는 바람에 결국 3자회담이 되고 말았지만 이 자리에서 조봉암은, 대통령후보는 신익희로 하고 당선되면 민주당단독으로 내각을 구성해도 좋으며 부통령후보는 박기출로 한다는 등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5월 5일 신익희가 호남유세도중 급서하게 되고 야권대통령 후보를 조봉암이 맡게 되자 박기출은 9일 “부통령후보를 단일화하기 위해 용퇴한다”는 성명을 내고 장면에게 양보한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과 조봉암이 1대1로 맞붙게 된 제3대 대통령선거결과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당선되고 부통령은 박기출의 사퇴로 단일후보가 된 장면이 자유당의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된다.

이승만이 선거에서 적지 않은 표 차이로 이겼다고 하지만 관권선거 개입 등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당시 선거상황에 대해 박기출은 그의 저서 “한국정치사”(韓國政治史)에서 “이승만의 당선은 날조된 것이었다. 샌드위치표 등 부정개표가 난무한 전형적인 관권선거였다”고 적고 있다.
선거가 끝나자 진보당추진위는 모든 야권을 망라한 야권단일정당을 추진했으나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조봉암 박기출 김달호 등 진보당과 서상일 이동영 주기형 유천 고정훈 등 민주혁신당으로 양분된다. 결국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측은 서울시공관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위원장에 조봉암 부위원장에 박기출 김달호 간사장에 윤길중을 선출하고 진보당을 출범시켰다.
박기출에게 고난의 길은 그렇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진보당의 당세확장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제4대 민의원선거를 앞둔 58년 1월 진보당 간부들을 보안법 위반혐의로 전격 구속시켜 조봉암제거작업에 들어간다. 이른바 ‘진보당사건(進步黨事件)’이다. 구속사유는 진보당 간부들이 북한간첩과 내통, 정치자금을 받아썼다는 것인데 특히 조봉암은 이중간첩 양명산(梁明山=梁利涉)과 접선, 정치자금을 받아 진보당을 창당했다는 혐의였다. 이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사법파동의 과정을 거친 최종심에서 조봉암 양명산 사형, 박기출을 비롯한 나머지 전원은 무죄로 풀려났다. 그 해 7월 30일 변호인단의 마지막 재심청구가 기각되고 다음날인 31일 진보당 당수 죽산(竹山)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극비리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조봉암이 사형을 당하자 박기출은 참담한 심정으로 낙향하여 부산에 머문다. 진보당 정치인들 모두가 활동 정지상태에 빠진 것이다.

반독재 민주운동에 나서다

진보당사건 공판(1958)진보당사건 공판(1958)

진보당사건 공판(1958) 진보당의 몰락과 동시에 자유당 정권은 종착역을 향한 막바지 폭압정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진보당사람들이 물밑에서 숨을 죽이고만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1959년 12월이 되자 진보진영은 서서히 물밑 세규합을 다짐하고 나선다. 성민학회(醒民學會)의 김배영(金培英), 김한덕(金漢德)과 구진보당계의 윤죽향(尹竹鄕), 김재봉(金在奉), 임갑수(林甲守)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민주당 신당계의 서상일(徐相日), 김성숙(金成璹), 진보당계의 김달호(金達鎬), 윤길중(尹吉重), 민족주의 민주사회당 소속의 이훈구(李勳求), 전진한(錢鎭漢), 공화당계의 장택상(張澤相), 무정부주의자인 정화암(鄭華岩) 등과 연속적으로 접촉하면서 신당결성을 암암리에 추진하기 시작했다.
1960년 2월 2일 부산서 서울로 올라간 박기출은 서상일 장택상 이훈구 김성숙 정화암 등과 함께 “반독재민주수호연맹”을 결성하게 된다. 한 달 반 가량 앞으로 다가온 정부통령선거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2월 8일 3·15정부통령선거에 대비, 대통령후보에 장택상, 부통령후보에 박기출을 각각 지명하면서 대선준비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반독민련이 후보등록일인 2월13일이 임박해 등록서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류탈취사건이 발생한다. 서울 서대문구청 앞에서 자유당정권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습격, 등록서류를 탈취하고, 연맹원 수 십 명이 부상을 당하는 테러가 발생한다. 이로써 반독민련은 후보자등록도 하지 못하고 결성된 지 11일 만에 와해의 길을 걷고 만다. 부통령후보로 추대되었던 박기출은 후보등록도 무산된 채 부산에 있는 자신의 병원에 감금됨으로써 정치활동의 길이 다시 막히는 처지가 되었다.

전당대회(1968. 왼쪽부터 박기출, 조헌식, 김성숙)전당대회(1968. 왼쪽부터 박기출, 조헌식, 김성숙)

처음부터 3·15정부통령 선거는 자유당정권이 스스로 몰락을 자초하고 마는 결과를 몰고 왔다. 선거결과 정부통령에 이승만 이기붕이 각각 당선되었으나 사상최대의 부정불법선거를 자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드디어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부정선거 규탄의 물결은 마침내 4·19혁명으로 발전,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을 내고 하야(下野)하고 이기붕일가의 자살과 함께 이승만독재정권은 비운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부산에서 4·19혁명을 맞은 박기출은 그의 논설집 “내일을 찾는 마음”에서 자유당 정권의 몰락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15년 간 이승만정권의 타도를 위해 싸워왔으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청년학도들의 피로써 이승만을 축출케 되었구나. 나의 정치적 투쟁이 좀더 슬기로웠다면 수많은 이 땅의 꽃들을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4·19혁명은 박기출같은 진보 및 혁신세력을 수면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정치세력으로 결집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분파로 갈라져 있던 혁신 및 진보세력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구진보당과 민주혁신당 근민당계 인사들이 광범위하게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이다. 박기출은 서상일 윤길중 등과 함께 사회대중당의 깃발아래 정치참여에 복귀했다. 사회대중당은 5월 13일 발기를 선언한 데 이어 6월 17일 창단준비위를 발족, 대표에 서상일 간사장에 윤길중을 선출하고 박기출은 총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4·19혁명 뒤의 과도정부 내각수반이 된 허정(許政)은 3?15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7월29일 총선실시를 공고, 다시 정국은 선거국면으로 접어든다. 박기출은 부산진갑구에서 출마했으나 1만 2천여 표를 얻어, 2만 5천 9백여 표를 획득한 민주당후보 이종남(李鍾南)에 패배, 낙선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
7·29총선은 박기출 뿐만 아니라 혁신계의 정계진입을 거부했다. 혁신계 정당 중 사회대중당이 1백 29명 한국사회당이 21명 한국독립당이 12명의 후보를 각각 공천해 출마했으나 사회대중당 4명 한국사회당과 한국독립당이 각 1명씩 당선시켰을 뿐이었다. 이해 반해 보수정당인 민주당 1백 75명의 당선자를 내 전체의석의 75.1%를 차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사회대중당은 다시 김달호계와 윤길중계로 양분되면서 박기출과 윤길중 그리고 한국사회당의 김성숙 혁신연맹의 정상구 사회혁신당의 고정훈 등이 통합하여 통일사회당을 결성한다. 그러나 그 해 5월16일 박정희(朴正熙)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모든 혁신계 인사들의 검거령이 내려지고 박기출은 수배당한 채 도피생활에 들어간다. 박기출은 6년 간의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1967년 4월 광주에서1967년 4월 광주에서

박기출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다시 정계에 발을 내딛는다. 그는 민중(民衆), 신한당(新韓黨)이 총선에 대비하기 위해 통합, 거대야당이 된 신민당(新民黨)에 참여해 그 해 6월 8일 실시된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 여당인 공화당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박기출이 20여 년의 정치생활 가운데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박기출은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혁신이냐 보수냐의 경계를 넘어서서 민주세력이냐 독재타도냐를 선택한 결과였음이 틀림없다.
2년 뒤인 1969년 박정희정권은 3선개헌(3選改憲)을 통해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고, 제1야당인 신민당은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이철승(李哲承) 등 소장파의원들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면서 세대교체를 선언하고 나섰다. 이때 윤보선(尹普善)은 재야인사를 흡수하여 신당인 국민당(國民黨)을 창당한다. 그 때가 1971년 1월6일이다. 처음 국민당은 이범석을 대선후보로 내세우려 했으나 이범석이 거절하자 3월22일 박기출을 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그는 저서 “한국정치사”에서 민족통일을 전제로 민족적 자각을 환기시키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후보를 맡게 되었다고 밝혔다.
국민당은 그러나 선거일 4일을 앞두고 운영위를 열어 대선포기를 결의한다. 박기출은 이에 승복하지 않고 전국을 돌면서 끝까지 유세를 하는 등 선거전에 참여했다. 결과는 4만 3천 7백여 표를 얻는데 그쳤지만 그의 목표는 조국통일과 민족의식 고양에 뜻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이어서 1973년 2월 27일 실시된 제9대 총선에서 서울 동대문구에 무소속으로 출마,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이번 총선낙선은 박기출에게는 사실상 정계 은퇴를 안겨주었다.

3선 개헌 반대강연(1969)3선 개헌 반대강연(1969)

이듬해인 1974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구주(九州)지방의 무의촌 병원과 보건소에서 의사로 근무하면서 그는 해방후의 한국정치사를 담은 『한국정치사(韓國政治史)』를 집필, 1974년 동경에서 일본어판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승만과 박정희정권에 관해 비판적이었다는 이유로 1989년까지 금서조치가 내려졌다. 출판을 서두르고 있을 때 이미 그는 암 선고를 3선 개헌 반대강연(1969) 받고 동경대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병세가 회복될 가망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 한국의 가족들이 서울 자택으로 이송하는 수속을 밟았으나 정부는 끝내 가족들의 여건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위급해진 가족 가운데 미국의 의과대학에 의사로 근무하는 둘째 아들이 서울로 이송,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곧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박기출은 짧지 않은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1946년 한국민주당의 음해로 인해 투옥된 것을 비롯, 1956년 이승만정부에 의해 투옥, 1958년 진보당사건으로 투옥, 1959년에 진보당사건으로 재투옥, 1960년 허정내각과 민주당 때 투옥되는 등 모두 5차례에 걸쳐 감옥을 가야했다. 또 1961년과 1967년 박정희군사정권의 박해를 피해 잠행한데 이어 1972년 박정희대통령의 유신체제를 피하여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1977년 8월 5일 파란만장의 1968년간에 걸친 일생을 마친 것이다. 자식들에게 “정치를 하고 싶거든 통일된 뒤에 하라. 우리민족 모두를 한집안 식구로 생각하라”는 유서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박기출은 『내일을 찾는 마음(1968년)』『인간을 위한 종교(1975년)』『인간과 삶과 종교』『한국정치사』등 4권의 논설집 등 저서를 남겼다. 『인간과 삶과 종교』는 저자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시로 표현된 시집(詩集)이다.
『한국정치사』는 그가 한국전쟁 중 조국의 파괴와 절망 속에서 민족의 나아갈 길을 찾고자 하는 뜻에서 세운 새한학회가 일본어판을 2004년 한글판으로 출판한 것이며 이 때 나머지 시집과 논설집도 함께 다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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