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글자크기

동구인물

상세보기 - 동구인물, 제목, 내용, 파일, 카테고리, 조회수, 작성일, 작성자등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제목 독립운동가 박재혁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7.10.30 조회수 2757

독립운동가 박재혁

독립운동가 박재혁
  • 박재혁(1895-1921, 朴載赫)
  • 1895.5.17. 동구 범일동 출생
  • 구세단, 의열단 활동
  •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 옥중 단식으로 순국
1920년 9월 14일 오후 2시 30분, 용두산 아래에 있는 부산경찰서. 경찰서장 하시모토에게 면회를 청하는 중국인이 있었다. 얼마전에 세칭‘밀양폭탄사건’이 있었던지라 경찰서장은 잔뜩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 고서적을 좋아하던 하시모토는 진귀한 중국고서를 가지고 왔다는 고서적 상인을 별다른 의심없이 서장실로 불러 들였다. 이윽고 중절모를 쓰고 2층의 서장실에 들어선 중국인 상인은 제법 묵직한 보퉁이를 펼치고 고서를 꺼내 경찰서장 하시모토에게 건넨다. 중국 상인이 이런 저런 설명을 곁들여 상술을 펼치자 하시모토는 고서를 이리저리 뒤적이며 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바로 그때, 중국 상인이 고서 밑에서 전단을 꺼내어 하시모토에게 던지며 유창한 일본어로 꾸짖어 소리쳤다.“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놈들이 우리 동지들을 잡아 우리 계획을 깨트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는 것이다.” 이어서 전단과 함께 서적 아래 숨긴 폭탄을 들어 하시모토를 향해 던졌다. 폭탄이 떨어진 경찰서장실은 책상과 집기가 부서지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중상을 입은 하시모토는 혼절하여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숨졌다.
훗날‘부산경찰서폭탄사건’이라 불린 이 사건은 조선인 비밀결사의열단의 항일투쟁이었고, 부산경찰서장에게 폭탄을 던져 절명케 한 고서상인은 바로 부산 출신의 의열단 단원인 박재혁이었다.
의열단은 1919년11월10일 중국 길림성에서 김원봉을 단장으로 결성된 항일 단체로서, 암살과 파괴를 투쟁방법으로 삼고 있었다. 즉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밀정,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를 암살대상으로 조선 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기타 왜적의 중요기관 등을 파괴 대상으로 선정하여 1929년 해체할 때까지 수십건의 암살 파괴투쟁을 감행함으로써‘의열단’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일제와 친일 주구들을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하였던 것이다.
1920년 3월 의열단은 다량의 폭탄과 총포를 중국에서 국내로 밀반입하여 일제 기관의 파괴를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황상규, 곽재기 등 십 수명의 단원 및 동지가 체포되고 말았다. 이것이 세간에서 말하는‘밀양폭탄사건’이다. 이 일이 있은 후 김원봉은 의열단원 체포에 앞장섰던 부산경찰서를 응징하기 위하여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암살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박재혁의‘부산경찰서폭탄사건’이었던 것이다.
박재혁은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서 박희선과 이치수의 외아들로 1895년5월17일에 태어났다. 사립부산진보통학교를 거쳐 부산공립상업학교를 다녔다. 부산공립상업학교는 부산진일신여학교, 동래고등보통학교와 더불어 조선인 학교로는 부산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설립된 근대적 교육기관이었다. 따라서 이들 학교들은 비록 일본이나 서양학문을 수입하여 교육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학생들의 민족의식은 자못 강렬하였다.
부산공립상업학교 시절 박재혁은 이미 강한 민족의식을 지닌 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2년 박재혁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최천택, 김병태, 박흥규와 함께 우리나라 역사를 서술한 서적, 즉『동국역사』를 등사기로 찍어 부산상고, 동래고보, 부산진일신여학교 등 시내 주요 학교와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는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한 직후로서 조선의 학문서적을 강탈하고, 특히 조선역사에 대한연구와 교육을 탄압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 때 우리나라 역사서를 배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일제 통치정책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결국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널리 배포되지는 못했지만, 일제 강점 초기에 있었던『동국역사』의 배포사건은 부산의 학생 및 청년층에 상당한 파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이듬해인 1913년 박재혁은 최천택을 중심으로 김병태, 박흥규, 왕치덕, 조영상, 오택 등과 더불어 구세단을 결성하였다.‘구세단’이란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워 나라를 구하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이들은 구세단 단보를 발행하여 부산·경남 일대의 항일 애국자들에게 배포하는 것을 계기로 동지를 규합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강점 초기에 친일단체를 제외한 모든 한국인 단체를 탄압하였으므로 일제에 항거하는 한국인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909년 백산 안희제를 중심으로 영남지역의 청년 지식인들이 결성한‘대동청년단’을 비롯하여, 1915년에 결성된‘조선국권회복단’과 같은 것은 대표적인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그에 비해 구세단은 소규모 결사였지만 부산에서는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첫 세대들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부산의 청년운동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구세단 활동으로 인해 박재혁 등 구세단의 주요인물들은 일제에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이후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는 요시찰 인물이 되어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박재혁은 일제의 야수적 폭력성을 경험하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를 계기로 최천택, 오택과는 어릴적 우정을 나누던 친구에서 목숨을 건 항일투쟁의 여정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평생의 동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5년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한 박재혁은 일단 항일투쟁을 접고 생업에 몰두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간 홀어머니와 어린 누이가 힘들게 꾸려온 가정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박재혁은 부산가스전기주식회사에 취업하여 근무하기도 하고, 이를 그만두고 경부선을 통해 경상북도 왜관을 왕래하며 상업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무역업을 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항하게 되는데, 이 중국행에서 박재혁은 그의 이름을 항일독립투쟁사에 아로새기게 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상업활동은 그 특성상 각처의 인심이나 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기 마련이다. 더욱이 박재혁이 활동범위로 하는 중국 등지는 한국인 항일 투사들의 주요 무대였다. 박재혁은 1917년 중국으로 가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이듬해에 귀국하고, 다시 1919년에 상하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를 돌아다니며 상업 활동을 계속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의열단과 조우한 것도 이즈음이었던 듯하다. 해외에서 항일 투사들의 우국충정을 접하고 국내에서는 3.1운동으로 분출한 한국인의 저항 의지를 목도하면서, 청년 박재혁은 가슴속에 뜨거운 불구덩이가 솟아오르고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부산상업학교 졸업 이후 잠자고 있던 민족적 투지가 다시금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바로 이 즈음이었다.
이에 앞서 박재혁은 1920년 3월 무렵에 중국에서 귀국하였는데, 이 시기는‘밀양폭탄사건’이 실행되기 시작한 때이다. 밀양의 의거가 실패로 끝난 후 김원봉은 새로운 투쟁을 실천하기 위하여 박재혁을 선택하고 결단을 요청하였다. 일찍이 홀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항일투쟁의 의지를 접은 바 있는 박재혁은 또다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나, 결국 가슴속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독립운동의 한길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하였다.
이 과정에는 부산상업학교 시절에 함께 구세단 활동을 하였던 김병태가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병태는 중국으로 가서 의열단에 입단한 후 의열단 활동은 물론, 김원봉이 창당한 민족혁명당에서 김원봉의 비서로 활약하고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는 등 줄곧 김원봉과 행동을 같이 하였기 때문이다.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하고 거사 의지를 다진 박재혁이 다음달인 9월에 국내로 잠입하여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할 때, 이를 도와 결행케 한 것도 다름 아닌 김병태였다.
무척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일단 결심한 이상, 박재혁은 자신의 용기와 경험을 총동원하여 거사를 계획하였다. 시가지 한복판에서 그것도 부산경찰서의 서장을 처단한다는 것은 사실 보통사람으로는 생각조차 어려운 일이었던 만큼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특별한 지략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일제의 눈을 피해 입국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이를 위해 박재혁은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를 택하지 않고, 중국남해안에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배편을 이용하였다. 압록강을 건너는 방법은 편리하지만 일본 경찰과 밀정의 감시를 피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나강사키에 도착한 박재혁은 예정했던 시모노세키를 경유하는 경로를 변경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관부연락선은 한국인이 많이 이용하는 탓에 일본 경찰의 감시가 삼엄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박재혁은 나가사키에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코스를 선택하는 기지를 발휘하게 된다. 변경된 일정에 대해서는 간단한 봉함엽서를 통해 내막을 알렸다. 여기에도 감시를 피하기 위한 갖가지 은유와 암호가 동원되었다. 나가사키를 떠나기 직전인 9월4일 박재혁이 상하이에 있는 동지에게 보낸 엽서에는 당시 독립 투사들이 흔히 사용하였음직한 기밀 사항의 전달요령이 잘 나타나 있어 흥미롭다.
이렇게 감쪽같이 부산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부산경찰서장에게 접근하는 것은 더욱 문제였다. 이를 위해서는 고서적 상인으로 위장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하시모토가 중국 고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미리 알아두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중국을 떠나기전에 다량의 고서적을 구입하여 행장을 꾸리는 치밀함도 발휘하였다. 중국인으로 위장한 것 역시 일본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물론 김병태를 비롯한 의열단원과 논의한 결과이지만, 동아시아 일대를 무대로 한 박재혁의 활동경험이 활용되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무역업에 종사하느라 능숙해진 중국어와 일본어 역시 박재혁이 이번 임무를 수행하는데 적임자가 되게 하였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아무도 모르게 부산으로 돌아온 박재혁은 그의 오랜 지우이자 동지인 최천택, 오택 등 부산 지역민족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박재혁은 일제가 건설한 도시 부산의 한 가운데서 그 통치의 심장에 해당하는 부산경찰서장을 처단하는 거사를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재혁의 거사에 일제는 경악했다. 불과 몇 달 전에 미수에 그친‘밀양폭탄사건’에 이어, 다시 의열단의 투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오사카의 주요 일간지들은 사건이 벌어진 도시가 지난 300여년간 왜관이 있던 곳이며 일본에 의해 개발된 대표적인 도시인 부산이라는 점에 대한 일본 사회의 충격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또한 거사의 주인공인 박재혁이 부산 출신으로, 일본식 근대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라는데서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회의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렇게 박재혁의 거사는 일제통치자에게는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고, 한국인에게는 폭력적 통치 아래서도 꺾이지 않는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재확인시킨 사건이었다.
그러나 폭탄을 투척하는 과정에서 박재혁 역시 부상을 당하였으며, 이 때문에 박재혁은 현장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최천택을 비롯하여 박재혁의 거사를 도왔던 부산의 청년계도 곤욕을 치뤘는데 특히 박재혁이 중국으로 들여온 폭탄을 숨겨주었던 오택은 박재혁과 함께 대구에서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박재혁의 체포 소식을 전해들은 김원봉은 자신의 특별한 당부가 살아 돌아올 수도 있었던 박재혁을 죽게 만들었다며 장탄식을 했다고 한다. 김원봉은 부산경찰서장을 죽이되, 그냥 죽이지 말고 반드시 의열단의 복수임을 밝히고 죄를 추궁할 것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박재혁은 처음부터 거사를 성사시키는데 마음이 있었을 뿐 이미 생사를 초월했던 듯하다. 애초에 부산경찰서의 서장실에서 서장의 지척에서 거사를 꾀한 것 자체가 대담함과 더불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헌신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부산으로 출발하면서 상하이의 동지에게 띄운 서신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엽서에서 박재혁은‘당신의 얼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라고 하여, 거사를 앞둔 비장한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폭탄으로 인한 상처와 혹독한 고문, 부산지방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다시 경성고등법원으로 이어진 재판의 끝에 예상대로 박재혁은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조차 박재혁을 굴복시키지는 못하였다. 도리어 박재혁은‘왜놈의 손에 욕되게 죽지 않겠다’며 단식을 감행하여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결국 박재혁은 단식으로 인해 1921년5월11일, 27세(만25세)의 나이로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박재혁의 죽음은 일제의 총칼조차 어쩌지 못한 조선 젊은이의 기백을 다시금 보여준 것이었다.
온몸을 던져 역사와 맞섰던 의로운 청년의 기개는 오늘날 그의 모교인 부산진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청룡동의 범어사와 초읍의 어린이대공원 등지에 박재혁의사기념비로 조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독립장을 추서했다.
목록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제 4유형 출처표시 + 변경금지 + 상업적이용금지 본 공공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 조사 폼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행정문화국 문화체육관광과
  • 문의전화 051-440-4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