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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눌원 문화재단 설립자 신덕균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7.10.30 조회수 2367

눌원 문화재단 설립자 신덕균

눌원 문화재단 설립자 신덕균
  • 신덕균(1909-1999, 申德均)
  • 동구 초량동 태평정미소 설립
  • 애국지사의 후원 및 독립군 군자금 제공
  • 범일동 눌원빌딩, 부산정미주식회사 설립
  • 눌원문화재단설립 - 문화정려사업
  • 눌원문화상 제정

성 장

신덕균(申德均, 1909-1999)은 부산시 강서구 동선동(당시 경남 창원군 천가면 동선리)에서 1909년 8월 21일 아버지 신태규(申泰奎), 어머니 조선이(曺仙伊)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호는 눌원(訥園)으로 평생토록 아호의 뜻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수산업에 종사하여 비교적 부유한 가정을 만들어 왔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마을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개명된 부모들의 주선으로 동경 유학을 다녀온 후, 곧 바로 구포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는 김정환(金楨煥)의 딸 김영자(金榮子)를 아내로 맞았다.
그는 천가보통학교(天加普通學校)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곧 서울 경신고보(敬新高普)에 진학했다. 그 당시 경신고보는 5년제 사립 미션스쿨(Mission-School)로 이상재(李商在), 안재홍(安在鴻), 홍명희(洪命熹) 등이 출강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 교육을 시켜왔다. 1920년대에 불기 시작한 민중계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의 바람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 신덕균도 이 대열에 참가하여 조국과 민족의 소중함을 배우기 시작했다.
신덕균의 청운의 꿈은 동경유학으로 이어져서 일본(日本) 와세다[早稻田]대학에 진학하여 조국의 경제적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1934년에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93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서는 아직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근대적 사상이 짙었고, 더욱이 동경유학을 하고 돌아 온 사람이‘장삿길로 나선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시기였다. 그러나 신덕균은 유별나게 민족주의 사상이 강한 사람이었다. 신덕균은 비록 일본 동경에서 공부했지만 정신만은 조선사람의 영혼을 그대로 갖고 돌아온 것이다.
1935년 동경에서 돌아 온 이듬해 그는 일본에서 닦은 젊은 꿈을 조국에서 실천하는 첫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정미소(精米所)를 경영하며 쌀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초량 뒷골목에 [태평정미소(太平精米所)]간판을 내걸었다. 신학문을 닦고 돌아 온 동경유학생으로 오로지 ‘가난한 내 조국의 경제 부흥을 위하여, 어떻게 하면 일본인 보다 잘 살 수 있고, 보릿고개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을 개척하는 것이 그의 포부였다. 이 시작이 그를 한국의 50대 재벌에 들어가게 하는 촉매가 될 줄은 그도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다.


쌀로서 일군 조국 경제

「태평정미소(太平精米所)」는 쌀로서 한국 경제를 일군 초석이 되었다. 신덕균은 이 정미소를 시작으로 평생을 식품사업에 투신하여 5천여 명의 직원과 함께 연간 5천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재벌대열에 선 것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다. 이것이 신덕균의 경영 철학이다. 당시 한국 사람에 있어 쌀은 생명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 사람에게 쌀을 통제하는 것은 생명을 담보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일제는 식민지 정책으로 한국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하기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서립하고 그 이후 한국인의 땅을 빼앗고, 쌀을 통제하여 공출제도를 만들어 일체 곡물을 일본으로 보냈다.
1939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미곡통제령(米穀統制令)을 공포하고, 1940년에는 조선미곡시장주식회사(朝鮮米穀市場株式會社) 설립과 함께 각 도(道)에도 양곡주식회사(糧穀株式會社)가 설립되었는데 이것의 기능은 만주(滿州)에서 생산된 잡곡 등을 도정하고 양곡의 배급업무를 담당하게 했던 것이다. 신덕균의 사업은 일제의 양곡정책으로 온갖 잔학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발전해 왔다.
그러나 신덕균은 더욱 입지(立志)를 가다듬고 오로지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에만 힘을 기울였다. 이때 일본 경찰들은 [태평정미소]에 ‘경계령’을 내려 밤낮으로 살피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광복이 되는 10여 년 동안 신덕균에게는 시련이 연속되었다. 한편 일제의 억압이 더 할수록 그의 유학시절 길러진 민족주의 사상은 한층 강화되어 오로지 나라와 겨레가 발전하고 번창하여 일본이 한국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그의 실천정신은 경남지역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의 후원과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35회에 걸쳐 연행되기도 했다.
1941년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은 우리 민족을 못살게 하는 또 하나의 방편이 되었다. 한국 민족에 대한 일제의 수탈과 억압은 천인공노할 지경에 이르렀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허울 아래 그들은 이 땅의 자원과 물자를 공출해 가고 젊은이들은 총알밥으로 생명을 강요했고, 장년들은 징용이라 하여 일본의 탄광의 막장신세로 만들었다. 창씨제도, 일본어 상용, 그리고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일찍 식민지역사에도 없는 해괴한 정책을 한국민족에게 강요했다.
그러나 신덕균은 혈기 왕성한 젊은이로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감격의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미군에 의해 중앙식량행정처(中央食糧行政處)가 설립되어 운영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10월에는 금융연합회(金融聯合會)가 조직되었다. 이러한 기구는 모두 식량문제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5ㆍ16이 있었던 1961년 농업협동조합(農業協同組合)이 설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경제계 인사들과 기념촬영(1982년 여름)경제계 인사들과 기념촬영(1982년 여름)

이 동안 신덕균은 천신만고의 역경을 딛고 8ㆍ15 해방을 맞으면서 더욱 사세를 확장시켜 왔다. 그가 경영하는 태평정미소는 벌써 해방이 되기 전부터 부산지방에 4개소, 호남지방에 3개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1946년에 와서 그는 지금 부산시 동구 범일동 눌원(訥園)빌딩에 부산정미주식회사(釜山精米株式會社)를 설립했다.
나라에서는 이 업적을 인정하여 1950년에 그를 대한민국 중앙정책위원으로 위촉했다. 이어 경상남도 곡물협회 회장직과 함께 대한민국곡물협회(大韓民國穀物協會) 회장에도 부임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40고개를 넘어설 때였다. 1952년에는 서울의 원용석, 주석균 등과 함께 대한민국의 양곡정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대한중앙양곡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회장자리에 올랐다. 그후 1958년에는 상공부 무역위원, 1960년에는 농림부 농림시책 자문위원, 1965년에는 상공부 무역위원, 1965년에는 한국미곡수출협회 이사장을 맡게 되었다. 실로 한국미곡정책의 최고의 자리를 획득하여 대인이 된 것이다. 신덕균은 1935년부터 1965년까지 30여년 동안 한 우물만 파고 견디어 왔다. 그것은 오로지 한국의 쌀이었다. 고집불통의 고집대인 신덕균은 명실공히 ‘한국의 곡물왕’인 것이다.


동방흥업(東邦興業)의 영광

1946년 6월 신덕균의 계획 속에는 거대한 제2의 꿈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민족경제의 설립]이었다. ‘일제에게 받은 그 설움을 내 조국의 경제 부흥으로 보복해 보겠다.’는 것이 신덕균의 구상이었다. 그것이 [동방흥업주식회사]의 설립이다. 동방흥업의 유통은 곡물도매업, 대규모의 도정업, 그리고 선대부터 내려오는 수산업이었다. 미곡의 도정은 본인의 정미소가 담당함은 물론 곡물의 도ㆍ소매까지도 맡게 되었다. 수산업은 가업의 계승으로 선박 두 척으로 주로 근해해역에서 저인망어업을 했다.
이 저인망 근해어업은 신덕균의 사업수단을 한 단계 높여 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 어업은 6ㆍ25동란을 거치면서 1950년대 중반까지 동방흥업주식회사의 사업 성공사례에 속할 정도로 잘 되었다. 이로 인하여 동방흥업주식회사의 사세가 지방에서 서울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회사의 경제권도 지방에서 서울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신덕균이 주로 중앙정부 산하의 자문위원으로 위촉이 된 것도 모두 이와 관계가 있었다.
1962년 3월에는 동방흥업주식회사가 부산시 중구 대교로 2가 72번지에서 서울 중구 명동 2가 57번지로 옮겨 전국의 도정과정을 근대식 기계설비로 갖추어 전면 확장했다. 이때 동방흥업주식회사의 사세는 최고 수준에 이르렀고, 이에 호응하여 국내 유수한 경제 단체가 이에 가담할 의사를 밝혀 왔다.
이때 장년의 신덕균은 젊은 시절에 유학했던 동경 땅에 대한 추억에 얽힌 야망을 버릴 수 없어 제2의 꿈의 현장을 일본에 심고자 드디어 그 땅에 종적을 남기게 되었다. 일본(日本) 동경도(東京都) 중앙구(中央區) 강호교(江戶橋) 13 중공(中公) 빌딩에 동방흥업주식회사의 동경사무소 간판을 걸었다.
‘그의 가슴은 벅찼다.’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환희가 교차 했다. 얼마나 하고 싶던 일이었는가. 그러나 이제 모두 잊고 그들과 선린의 경제교류를 할 것을 다짐했다. 이 동방흥업은 다시 아이디어를 창출했다. 1963년 1월 서울 마포구 공덕동 23번지에 5,000여 평의 공장을 건설하고 [태평표]라는 브랜드로 소맥분 마포공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이 사업은 이후에 설립한 동방유량까지 계속하게 되었다. 이 사무소는 주로 대일본과의 곡물수출을 위한 창구로 이용되었다.


부산상의(釜山商議)에 남긴 발자취

지금 우리는 지방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방시대]란 지역사회의 독자적 특성을 살려 그 지방만이 갖고 있는 경제적, 지역적,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대상으로 그 사회가 발전해가는 행정적 독립성을 말하는 것이다. 벌써 신덕균은 60년 전에 이것을 예지한 것이다. [상공회의소], 이것은 지방 경제인들이 함께 모여 지방을 경제적으로 잘 살게 하기 위하여 벌리는 운동인 것이다. [부산상공회의소]의 설립, 이것은 부산사에 있어서는 공전(空前)의 대업(大業)이라 할 수 있다.

부산상공회의소 회관 신축기념식장(1957년)부산상공회의소 회관 신축기념식장(1957년)

1946년 7월 10일! 비록 임의단체이기는 했지만 [부산상공회의소]란 이름을 걸고 새로 발족한 날이다. 신덕균은 이 창립총회에서 상임위원으로 발탁되고 이를 시작으로 1949년에서 1950년까지 2년 동안 수석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부산상의가 1953년 상공회의소 법이 시행되면서 공법인 단체로 인가 나자 곧 초대 수석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때 임의 단체일 때 초대회장은 김지태(金智泰)였고, 제2대 회장은 이년재(李年宰)였다. 1957년 1월에는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에 피선되어 1960년 1월까지 회장직을 수행했으니 소위 ‘[부산상공회의소]의 여명기를 장식했다.’할 것이다.

부산상공회의소 회관 신축기념식장(1957년)부산상공회의소 회관 신축기념식장(1957년)

그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직을 역임하는 동안 이룩한 공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나 우선 1957년 11월에 준공한 부산 중구 소재 부산상의 회관에 자신의 사재를 투척한 금액은 당시 부산상의 전회원의 연회비를 능가한 금액이었다. 이때 총공사비는 68,000,000환이었는데 그중 그가 14,860,000환을 부담했다. 이것은 오로지 일제 때 일본에 설움 받은 ‘민족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고 그는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1958년 12월에는 드디어 부산상의가 국제적인 단체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바로 그것이 [국제상공회의소]의 가입이다. 신덕균은 이에 앞서 부산을 경상남도에서 분리하여 정부직할시로 승격시키는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이런 일련의 작업도 상공회의소의 독립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1967년 지방은행 설립의 출범을 가능케 하기도 했다.
이렇게 발전해 온 부산상의가 한 때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신덕균이 제3대 회장 당선을 둘러싸고 상의가 내분을 겪게 된 것이다. 당시 제3대 회장 입후보에는 임의 단체회장인 김지태가 출마하여 상의가 양분이 된 것이다. 이것을 그는 슬기롭게 극복하고 다시 부산상의 제3대 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이때 주로 상의 중심으로 활동한 경제인들은 부회장 박선기(朴善琪), 박정관(朴正寬), 김양추(金亮秋), 강석진(姜錫鎭) 등이 있었다.


눌원문화재단(訥園文化財團)의 설립

눌원문화재단은 1959년에 설립되었다. 이 단체가 시행하는 것은 주로 문화장려사업이다. 그 취지문에는 눌원문화상(訥園文化賞)은 1959년 지역사회의 문화향상을 장려하는 취지에서 시상하여 왔으나 1977년 10월 재단법인 눌원문화재단의 설립으로 조국문화 향상과 사회개발 명 부분을 확충보완하여 운영되는 영구적 포상제도이다.
눌원문화상(학술상ㆍ교육상ㆍ행적상ㆍ치안상ㆍ언론 및 체육상)은 조국의 각 분야에서 국력신장을 위하여 탁원한 업적을 이룩한 인재를 발굴하여 그 공로를 치하 격려하고 더욱 진지한 연구노력의 실적을 장려함을 목적으로 한다. 본상은 재단법인 눌원문화재단이 이를 시상한다.
신덕균이 일찍이 신지식의 선구자로서 동경유학을 한 면모가 이런 생활철학에서 나타난다. 1960년대면 서로가 못살아 하루의 생활을 걱정할 처지인 때 대인 신덕균은 벌써 10년 앞을 내다보는 민족을 위한 정신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눌월문화재단의 설립은 ‘조국의 정신적 활동이 경제적 활동과 병행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나타낸다.’는 것을 신덕균은 인지한 것이다. 평소 낙동강 문화권에 관심이 깊었던 신덕균은 언제나 지역사회의 발전과 향토 및 민족문화 향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발전해 가는 ‘조국의 장래를 위하여 우수한 인재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것의 결실이 [눌원문화재단]의 설립이다. 신덕균의 아호(雅號)가 눌원(訥園)이다. 그것은 [눌원문화상]을 제장할 때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의 말을 받아 드린 것으로 되어 있다.
눌원(訥園)! 그것은 논어 이인(里仁) 제4편에 나오는 [子曰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의 [訥(눌)]자를 따온 것이다. 곧‘군자는 모름지기 말하는 데는 느리더라도 행동에는 민첩해야한다.’란 뜻이다. 공자 논어에는 특히 ‘말을 조심 하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 학이(學而) 제1편에도 ‘[敏於事而愼於言]이라.’ 있다. 이것도 역시 ‘행동은 민첩하고, 언사는 신중하라.’는 것이다. 신덕균은 [느리고 민첩하라]는 말이 그에게는 평생의 철학이 되어 이것을 직접 실천하며 살아 온 것이다. 이 [訥(눌)]자에 [園(원)]자를 가져 온 것이 더욱 묘한 뜻을 갖고 있다. 신덕균이 바라는 [원]은 그가 가꾸어 온 모든 업체가 하나의 동산(東山)으로 이상향이 되게 개척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 [원]은 울타리 구실도 한다. [눌원]이 설립한 어떤 회사 단체도 그가 울타리가 되지 않고는 지탱될 수 없었다.

제31회 눌원문화상 시상식(1991년)제31회 눌원문화상 시상식(1991년)

이 아호는 [눌원문화상]을 제정할 당시 작명한 것으로 본다면 [눌원문화상]과 [눌원장학금]을 받은 모든 대상자는 [눌원]의 생활신조를 바탕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그의 뜻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문화상]이라는 것이 참으로 많다. 여러 기업들이 돈을 모아 문화재단을 설립하여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신덕균은 이미 이 기업들이 몽매간(夢昧間)에 있을 때 벌써 그 취지를 인지하고 출발한 것이다. 이 재단이 설립될 때 신덕균의 계산은 국민 전체를 문화민족으로 바꿔놓으려는 것이었다. 일제 때 겪은 그 가난과 문맹(文盲)에서 이 국민들을 구원하려면 바로 이러한 문화운동이 절대적 가치였기 때문이다.
또 한편‘국민을 상대로 하여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느 시기에 그 이윤을 가장 합리적이고 이상적으로 사회에 환원해 주어야 한다.’라는 하나의 방법이 이 [문화재단]의 설립이었다.
역대 [눌원문화상] 수상자는 1959년도부터 2003년도까지 무려 256명에 이른다. 원래 초창기에는 편의에 따라 문학, 공예, 음악, 사학, 미술 등 12명을 수상하다가 지금은 5개 분야 각각 학술에 2명, 교육 1명, 행정 1명, 치안 1명으로 하여 5명이 정해져 있다.


생을 마치고 더 소중한 이름

인간의 한 생명은 유한하다. 이 유한한 생명을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다. 신덕균 같은 입지전이 바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데 대한 모범답안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눌원 신덕군 선생 송덕비(부산시 강서구 성북동 덕문고등학교 소재)눌원 신덕군 선생 송덕비(부산시 강서구 성북동 덕문고등학교 소재)

1930년대의 최고의 인텔리겐차(intelligentzia)에 속한 동경 유학생 신덕균이가 미래를 투시하는 눈이 있어 정미소를 출발하여 한국의 대표적 재벌그룹에 속하게 된 것도 보통사례는 아니다. 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애국 운동가, 독립 운동가들에게 몰래 ‘활동자금을 제공해 왔다.’는 것도 흔히 보통 돈을 모으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닌가 싶다.
신덕균의 뼛속에 사무친 일본에 대한 원한이 오로지 [내 나라 내 겨레]의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덕균식 경영방법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민족주의와 경제 제일주의가 그의 철학이 되어 이 묘한 함수가 그의 일생을 있게 했다.
흔히들 고생하여 돈을 모으면 자기만족에 안주하여 주변을 살피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신덕균은 남들이 꿈도 꾸지 않았던 그 시절에 벌써 [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민족문화 창달에 앞선 운동을 시작했다. 문화상과 장학금, 연구조성비 그것은 모두 이 나라 2세들을 문화적으로 제1등 국민을 만들고 정신적으로 깨어나게 하려는 본보기였다.
신덕균은 1999년 1월 22일에 향년 90세로 이 세상을 뜨셨다. 그러나 그의 소중한 유업은 지금도 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찬연히 빛나고 있다. 한 인간의 생애가 이토록 위대하고 보면 역시 인간의 생명은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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